“무슨 별일이야 있을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슬리퍼 신고 반바지 차림으로 며칠 나들이 가듯 집을 나섰다고 뉴올리언스의 한인 이재민들은 말했다.
“뉴올리언스에서 허리케인은 연중행사이고 그때마다 큰 피해 없이 넘어가곤 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며칠 친지 집에 놀러 가는 셈치고 나왔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기세로 폭우가 쏟아져 제방이 무너지고, 도시는 물바다가 되고, 돌아갈 집은 흔적을 감춰버렸다.
이민 생활의 고단한 땀방울로 세워진 집, 벼르고 별러 마련한 가구들, 잡초 뽑고 비료 주며 정성 들여 가꾼 정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안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가족들의 추억을 하루아침에 수장 당한 후 한인 이재민들은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텍사스, 조지아, 테네시 … 타주의 친척·친지 집에서, 혹은 모텔에서 우선은 지내고 있지만 언제 물이 빠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 당장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할 지,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할지… 걱정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무슨 별일이야 있을까?”하는 무심함은 수해지역 밖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도 했다. 해마다 미국 동남부에는 으레 몇차례 씩 허리케인이 닥치니 새삼스런 일은 아닌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들려오는 소식은 하루가 다르게 험악했다. 사망자가 수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재해 규모도 엄청나지만 수해지역에서 자행되는 약탈과 노략질, 살인, 강간 등 폭동에 버금가는 무정부 상태는 “제3세계 어느 빈민국가의 일인가”싶게 처참하다.
뉴올리언스 컨벤션센터에서 한 이재민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와보니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총을 쏘아 사람들이 죽는다. 화장실에 가면 남자들은 강도를 당하고,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용변을 본다. 아기 기저귀도 우유도 없다. 지옥이 따로 없다”
식수도, 전기도 없는 상황에서 날씨는 더워 도시 전체가 썩는 냄새로 진동하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노약자들은 죽어서 사체로 물위를 떠다니며, 빵 한조각을 놓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짐승의 시간’이 재즈와 낭만의 도시, 뉴올리언스를 지금 채우고 있다.
노자는 자연을 만물의 어머니로 보았다. 도덕경에서 “자연은 만물을 낳아서 기른다. 만물을 낳아서 기르면서도 자기 소유로 삼지 않는다”며 자연의 겸허함을 배우라고 가르쳤다.
기술혁명의 발달 이후 인류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자연의 지배자로 행세했고, 그 오만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고 있다. 한없이 내어주고 한없이 품어줄 것 같던 대자연이 인내에 한계를 느낀 것 같다.
근년 지구 곳곳에서 지진, 홍수, 폭설, 가뭄 등 재난이 잦은 것을 단순히 자연현상으로만 접을 수는 없다. 인간이 개발과 발전에 눈멀어 불러들인 기상이변, 그로 인한 재앙일 수가 있다.
미국의 중앙부를 관통하며 2,300마일을 흐르는 미시시피강도 집중적 개발 대상이었다.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습지대를 항구로 만들고 주거지로 만들어 주변 풍경이 180도 바뀌었다. 지난 75년간 개발로 사라진 습지대는 100만 에이커라니 작은 주 하나의 크기에 해당한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황무지가 허리케인이나 홍수를 막아주는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 자연의 신비이다. 과학자들은 20년 전부터 그 사실을 경고했지만 우리 시대의 탐욕은 ‘환경’을 ‘개발’의 뒷전으로 밀어 버리곤 했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못 보는 어리석음이다. 카트리나는 뒤바뀐 가치의 우선 순위를 잔인하도록 뼈아프게 알려주었다.
이재민들이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되새길 것이 있다. 태풍에도, 홍수에도, 화재에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에 삶의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사람이고 사랑이다. 집이나 자동차… 생활의 소도구에 불과한 것에 정신이 팔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삶을 잃어버린다면 불행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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