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한국학교 교사>
아니 벌써 우유를 다 마셨나? 사온 지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틀을 지냈는데, 싱크대 밑 캐비넷에서 순간순간 좋지 않은 냄새가 풍겨 하수구가 새나 열어보니 어머나, 세상에!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냉장고에 들어가 있어야 할 우유 통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누가 그랬을까? 범인을 찾으면 한바탕 난리를 치리라 벼른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기억을 자꾸 잊는다.
주문을 전화로 받아놓고 기록해 놓지 않아 배달 되지 않은 거래처로부터 불평을 받기도 하고, 가격을 잘 못 말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분명히 메모 받아 전달 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난감해 할 때도 있고, 금방 통화한 분이 누구더라 하며 끙끙 거릴 때도 있다. 이럴 때 옆에서 꼭 한마디 던지는 말, 아니 무슨 사람이 그렇게 기억력이 없어요? 이건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 수준이야, 완전히 치매!
머쓱해 하는 남편, 당당한 아내.
남편에게 치매 운운하며 당당히 돌아선 내가 혹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 부엌 냉장고문 여닫는 사람은 나 뿐인데 내가 왜 그랬지?
내가 그랬나? 기억이 없다.
숫자 한자한자, 글자 한자한자 기막히게 외워내고, 정리정돈 완벽해 어디에 무엇이 어떻게 있을 거라고까지 기억해내던 남편이 점점 느슨해 지며 건망증까지 생기는 것은 나이 탓이라며 정당화 시킨다.
그렇지만 내가 우유를 냉장고에 넣지 않고 개수대 밑에 놓았다는 것은 용서 할 수가 없어 혼자 버럭 화를 내본다. 나는 아냐, 내 기억력이 얼마나 정확하고 확실한데, 다들 나이 먹어 건망증이 생길지라도 나는 아냐. 그럼 내가 누군데, 혼자 위로하며, 왜 손에 TV 리모콘을 잡고 있는지 고민에 빠진다.
주변의 많은 중년 부부들이 모이면 한결같이 하는 말, 요즘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아이 픽업 가는 데, 가다가 어디를 가는 건지 생각이 안 나서 되돌아왔다는 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늘 잊어버린다고 목걸이를 해서 목에 셀폰을 걸고 다니다가 이런걸 왜 목에 걸고 다니나 홱 내던졌다는 분을 보며 나는 참 한심 해 했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나는 늘 정신없이 나부 대지도 않고, 계획 속에서 계획대로 움직이는 완벽한자로 건망증이나 치매는 나에게 있을 수 없다던 내가 TV 리모콘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면?
나만은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하는 착각, 이것은 분명 건망증이나 치매 보다 더 무섭고 심각한 교만이란 증상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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