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삼순’ 틀어놓고 이쑤시개로 풋고추에 구멍을 여러 개씩 뚫어요. 다 되면 병에 담아 돌로 누르고 식초를 넉넉히 부어요 …”
어느 댁의 고추장아찌가 맛있어서 만드는 법을 물었더니 그 주부는 이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장아찌란 오래 두고 먹는 음식이어서 한꺼번에 많이 만들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재료 준비에 시간이 꽤 걸린다.
“‘삼순이’보면서 하면 지루하지 않잖아요”- 그 주부는 덧붙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주부들도 모두 공감하는 눈빛으로 ‘내 이름은 ’비디오 틀기를 조리법의 첫 순서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요즘은 여성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삼순이’가 예외 없이 화제로 등장한다. 드라마 사랑이 유별난 민족이다 보니 드라마가 범국민적 화제가 되는 일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모래시계’‘허준’‘대장금’‘파리의 연인’… 거의 전국민을 일제히 TV 앞으로 끌어 모으던 강력한 흡인력의 드라마들이 한국에서는 계속 있어왔다.
‘내 이름은 …’ 역시 한국에서 지난주 방영된 최종회 시청률이 50%를 넘으면서 ‘열풍’‘신드롬’등 요란한 수식어들을 달았다. 새로운 드라마가 선보이면 곧 잊혀질 허망한 호들갑이지만, 이번 ‘삼순이’의 경우는 좀 특이한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성별로 분명하게 갈리는 반응이다.
최종회의 연령별·성별 시청률을 보면 30대 여성은 43.3%, 40대 여성은 41.5%인데 비해 30대 남성은 14.3%, 40대 남성은 20.4%에 불과하다.
주위에서 봐도 여성들은 ‘삼순이’ 이름만 나와도 눈가에 웃음이 그득하며 재미있어 하는데 남성들은 시큰둥하다. “한두편 보다가 재미없어 그만 뒀다” “별 내용도 아닌데 왜 그 난리인지 모르겠다”에서부터 “뚱뚱한 여자가 설쳐대는 것 보기 싫다”는 반응까지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외모로 사람의 등급을 매긴다. 출연 배우들 얼굴만 보면 누가 주인공인지, 조연인지 금방 알수가 있다. 일종의 문화 코드이다.
‘삼순이’는 드라마의 이런 전통적 문법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수 있다. ‘예쁘고 날씬하고 청순하며 착하다’로 정의되는 전형적 여주인공 대신 살찌고 털털한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파격이 여성들에게는 열광을, 남성들에게서는 냉담을 불러온 요인으로 보인다.
TV 드라마는 현실의 정서를 먹고 크는 장르이다. 안방의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청률을 높임으로써 상업적 이윤을 얻는다는 기본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영화나 연극처럼 과감한 실험정신을 발휘하다가는 당장 대중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만다.
게다가 방송국 제작 책임자들이 대부분 남성이어서 남성 중심적 시각의 틀을 탈피하지 못했던 현실적 측면도 있어 왔다.
그렇다면 이번의 ‘삼순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꾸준히 변화해온 여성의 실제 모습을 마침내 현실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본다. 종전의 여주인공 모습이 ‘여성은 이래야 된다’는 남성들의 이상형이었다면, ‘삼순이’는 ‘여성은 이렇다’는 여성 자신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여주인공의 진화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원작, 극본 모두 30대 독신 여성들의 작품이다. 그들이 때로 지나치게 솔직하다 싶을 정도로 여과 없이 털어놓는 서른살 노처녀의 이야기를 보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것은 ‘어, 내 이야기네’싶은 동질의식.
‘다이어트 하겠다’ 굳게 결심하고는 돌아서자마자 먹어대고, 서른살 넘으면 가슴이 딱딱해질줄 알았는데 여전히 가슴 설렌다며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여성들은 ‘바로 나’로 일체감을 느낀다. 그런 ‘나’가 주눅들지 않고 할말 당당하게 다하고, 꿈에나 가능할 사랑을 얻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 드라마의 인기를 몰고 온 여성들의 속마음이다.
타고난 외모는 바꿀 수 없는 것. 당당하게 자기 자신이 될 때 존재의 빛이 난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에서 배울 필요가 있겠다.
권정희 논설위원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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