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사는 여고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국 전역에 사는 동기생들이 더 늙기 전에 부부동반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여행을 하자는 내용이다. 꼭 부부동반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렇지 않아도 터키, 그리스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어서 간다고 했지만 남편은 단체 여행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아 분명 여자들끼리 가라고 할 터이다.
친구는 10여 년 전에 15박16일로 다녀온 기막힌 추억이 있다며 유럽여행담을 털어놓는다.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각처에서 온 40여 명과 가이드와 만나 한 팀이 되어 버스로 여행을 시작, 브뤼셀, 네덜란드 등을 거쳐 극치의 자연미를 자랑하는 스위스에 도착하기까지 여행은 너무 즐거웠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빨리 움직여야 단체행동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데 남편이 어찌나 늑장을 부리는지 빨리 오라고 신호를 보냈단다. 그러나 남편은 느릿한 걸음으로 식탁에 와 앉더니 느닷없이 자기 발등을 사정없이 밟았다. 일행이 눈치챌까봐 비명도 못 지르고, 얼굴을 웃고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을 참았다. “조용하고 착한 남편이 별안간 폭군이 되다니 간 큰 남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이럴 땐 어떻게 하나 궁리하다 일단은 모르는 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알프스 설경에 매료되고, 빙하가 할퀴고 간 면도날처럼 뾰족한 고봉들 사이로 바닥까지 훤히 보일 것 같은 알파인 호수의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하며 호텔에 돌아와 보니 발등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슬펐다. 그러나 남편은 발등 밟은 기억은 전혀 없어 보이고, 이왕 비싼 경비 들여 온 여행인데 이 문제가 거론되면 피차 남은 여행이 엉망이 될 것 같아 침묵으로 인내하며 혼자 가슴앓이를 했다.
마지막 여행지 프랑스 관광을 끝내고 공항 대합실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슬며시 멍든 발등을 보여주었단다. 남편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데, 정말 몰랐던 것인지 자초지종 설명을 듣고 나서는 생각이 난다며 “어련히 가서 앉을 텐데 일행도 많은데 아이같이 보채는 것 같아 순간 화가 났었다”고 말했단다. 그리고는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도 좋은 여행을 위해 내색 안하고 참아줘서 고맙고 사랑스럽다”고 하면서 신사도를 벗어난 비겁한 행동이 부끄럽다고 용서를 구했단다.
갑자기 지혜로운 친구의 얼굴이 보고싶어진다. 서양 속담에 “결혼 후 3개월은 서로 관찰하고, 3년은 사랑하고, 그리고 30년은 용서하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한 지붕 밑에서 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예술행위에 준하는 고도의 창작세계라고 생각한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지붕을 한없이 두드리는 밤이다. 친구야, 세상 다하는 날까지 참으며 용서하며 사랑하며 멋진 삶을 살기 바란다.
유설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