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흡 <실버스프링, MD>
오전 시간은 정신없이 바빴다. 계속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더니 눈이 아물아물한다.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 통을 열었다. 아내가 새벽에 일어나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이다. 도시락 위에 하얀 종이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없던 물건이다.
이게 뭘까? 처음에는 아내가 식사를 하면서 입을 닦으라고 넣어준 휴지인 줄 알았다. 급히 꺼내들었다. 하얀 봉투가 나왔다. 다시 봉투를 열었다. 예쁜 꽃무늬가 새겨진 종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아내의 편지였다.
“여보, 요즈음 일하기 힘들죠?”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여보, 요즈음 일하기 힘들죠? 매일 아침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당신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죠?
당신은 고목나무 같아요. 속은 썩어도 말없이 자리 지키고 서서 철마다 무성한 잎사귀를 내고, 우리의 그늘이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니까요.
가을이 오고 있네요. 이제 무성한 잎사귀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사람들은 떠나가고 혼자 추위를 견뎌야 하는 고목나무.
점점 흰서리 내리는 머리카락. 그러나 아직도 꼿꼿하게 흔들리지 않는 지성. 하지만 물질에 유혹되지 말고 옛 선비처럼 깨끗하고 지조있게 당당한 실버 맨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빛 바랜, 그러나 품위 있는 젠틀맨으로 살아가길 바래요. 여보, 힘내세요. 우리에겐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주시는 주님이 계시지 않아요.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매미, 영원한 당신의 아내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평소 멋대가리 없는 할망구라고 투정을 하곤 했는데, 그 멋대가리 없는 할망구가 이렇듯 남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자기를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매미라고 했다. 가슴이 찡해 왔다.
자꾸 눈물이 났다. 늙으면 눈물이 헤퍼지나 보다. 주위 동료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뒤로 돌아앉아 손수건을 꺼냈다. 아내와 한평생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진한 감동을 받은 적이 또 있었던가. 오늘처럼 아내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요즘 장남이라는 멍에를 지고 힘들어하는 남편의 모습이 아내는 그토록 안스러웠나 보다. 집안 대소사의 굴레를 아내에게 씌우는 남편으로서, 동생들을 보듬어야 할 능력 없는 큰형으로서 이중 삼중 책무만을 지닌 존재일 뿐이다. 어디로 숨을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의 포로다. 집안의 모든 현실과 고통을 두 어깨로 지고 가는, 겉으로 웃지만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존재들이다. 장남의 자리는 정말 힘든 자리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힘들어하는 마음을 읽은 것이다. 아내는 이 사랑의 편지를 쓰려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아내의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는 나에게 천군만마보다 큰 힘이 된다. 여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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