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선 <알렉산드리아, VA>
우리 아버지는 원래 어느 면소재지에서 면장님으로 근무 하셨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사퇴를 하시고는 집에만 계셨다. 아버지의 병은 심한 해소 기침으로 숨이 차서 항상 가파른 숨을 쉬시곤 하셨기에 힘든 일은 하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그 많은 농사는 의사이셨던 외할아버지의 2남 1녀 중 고명딸로 곱게만 자라신 어머니의 몫이 되어 버렸다. 물론, 아버지도 농사를 짓기는 지었지만 몸으로 하는 농사가 아니고 말씀으로만 농사를 짓고 계셨다. 농사 짓는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아시고 계셨기에. 농사철이 되면 집안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씨를 뿌려야 하고, 어떤 약을 써야 되며, 어떻게 물을 조절해야 하는지, 진 땅과 마른 땅엔 무엇을 심어야 하는지 등 등. 아무튼 아버지는 농사에 대한 이론은 어느 박사 못지 않은 지식을 갖고 계셨다. 그리곤 가끔 사람들이 일하는 장소에 나오셔서는 이렇게 심어라, 저렇게 해라 하시며 참견을 하셨지만, 정작 논에 벼 한 포기, 땅에 호박 한 구덩이 심으실 줄을 모르시니 그런 아버지가 못 마땅한 어머니는 차츰 잔소리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저녁상을 물리시고 난 후 ‘농사 지어 당신 약값, 병원비 대다가 있는 땅도 다 팔아 나중엔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시키고 굶겨 죽이겠다’며 한탄하시자 우리 아버지 말씀이 “사람이 혼자서만 잘 살면 되겠는가. 잘 살던 사람은 못 살아도 봐야 하고, 못 살던 사람은 잘 살아도 봐야 하지 않는가. 잘 사는 사람은 맨날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맨날 못 살면 어떻게 하냐”라고 대꾸 하셨다. 세상에 성인이 따로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한 말씀 덕분에 늦도록 어머니께 핀잔을 들으셔야 했다.
우리 부모님은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두셨는데 큰언니는 일찍 결혼해서 서울에서 살았다. 어느 여름 날 언니는 첫 친정 나들이를 왔다가 하룻밤 자고 이튿날 저녁 때 서울로 가셨는데, 그 다음 날 조간 신문에 언니의 이름 석자가 인쇄되어 나왔다. 집에 도착하던 날 밤 감전사고로 저 세상으로 먼저 가셨던 것이다. 그것도 남을 대신 살려 놓고. 결혼한 지 4년만의 일이었다.
당시 언니의 유일한 세살박이 아들이던 윤웅이가 어느덧 결혼을 해서 아이 아빠가 되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크게 싸우시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공연히 언니를 일찍 시집 보내서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 어머니의 이유였고, 아버지는 그것이 다 저 타고 난 팔자인데 왜 내 탓을 하냐 며 화를 내셨던 것이다. 당시 형부는 대학생이었는데 미인이었던 언니한테 반해서 주말이면 찾아오곤 했었다. 그런 형부에게 어머니는 졸업한 후에 결혼하라고 했지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셨던 형부는 기어이 부모님을 졸라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첫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신 어머니께선 몇 년을 눈물로 사셨고.
아버지께선 언제부터인가 건강도 좋지 않으시면서 술을 자주 드셨는데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던 해에 53세의 젊은 나이로 먼저 간 언니의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 동네 사람들의 편지를 목청 높여 읽어 주시고, 답장을 쓰시고는 다시 또 읽어 주시던 아버지, 사람들이 답례로 가져 온 막걸리라도 한 잔 들이키시는 날엔 노래도 한 자락 멋들어지게 뽑으시던 아버지. 길을 가다가도 어른들이 지나가면 반드시 인사를 해야 한다며 예절교육을 철저히 시키셨고, 여자는 자고로 청결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사람은 늘 진실해야 한다며 틈만 나면 어린 우리들을 앉혀 놓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하느님 품으로 가신지 30여 년이 훌쩍 넘었나보다. 이젠 아버지의 얼굴 모습마저도 기억 속에서 멀어져 아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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