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모리얼 데이 맞아 참전 노병들 워싱턴기념공원 방문
메모리얼 데이를 앞둔 워싱턴 DC 몰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링컨 기념관이 저만치 보이는 공원에는 백발이 성성한 미국인들이 저마다 상념에 젖어 있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대부분 3-4일 휴가 일정으로 타주에서 수천마일 거리를 달려온 한국전 참전 노병들이다.
이들에게 저 먼 극동에서 전개됐던 한국전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전쟁이다.
버지니아 체사픽에 거주한다는 존 C. 피터즈씨는 “참으로 몸서리쳐지는 시간들이었어. 그래서 50년이 더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는 1950년부터 52년까지 34 보병여단에서 활약하다 양쪽 다리를 잃었다.
피터즈씨는 매년 메모리얼 데이나 독립기념일에는 육중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여 워싱턴을 찾는다. 이 기념공원에서 돌아올 수 없는 청춘과 조국애로 가득찼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라한다.
네브라스카에 사는 단 루자(77세), 탐 루자(74세)씨 형제는 한국전에서 함께 싸운 전우다. 동생인 탐 루자씨는 “한국전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당시 한국 시민들이 그 끔직한 전쟁을 겪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이라고 밝힌다.
형은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웠지만 전쟁이란 내 자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비이성과의 싸움이었기도 했다”라고 회상한다.
리 그로버스씨는 한국전에서 11개월동안 포로 생활을 했던 부친 로버트 그로버스씨를 대신해 아내와 딸을 데리고 방문했다. 그는 “아버지는 요즘와서야 한국전쟁에서 겪었던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며 “그만큼 상처와 충격이 컸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 공원을 찾은 재향군인들과 가족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건 한국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과 애정이다.
앞서의 피터즈씨는 “한국인들은 참 좋다”는 말을 연발한다.
1950-51년 공군 기상병으로 한국전에 투입된 패트릭 화이트(미시건, 80세)씨와 부인 메리씨는 평소 ‘코리안’이란 말만 들어도 환한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고 한다.
노병들의 관심은 단지 과거로 향하는 향수만은 아니다. 그들은 페허를 딛고 일어선 한국의 발전상에 흐뭇해하면서도 최근의 반미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에드 보철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재단 이사는 “과거는 미래의 서문”이라며 “요즘 반미 운동을 벌이는 한국 젊은이들은 한국전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한국전이 끝날 무렵 해병대 장교로 참전했으며 휴전 후에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MBA 학위를 획득한 뒤 한국 농경제 복구를 위해 15차례 한국을 방문한 경험을 가졌다.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마티 레이킴씨는 “단순히 나라의 부름을 받아 복무했을 뿐”이라면서도 “한미간의 우호적 관계가 지속됐으면 한다”는 바램을 감추지 않았다.
메모리얼 데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는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edom is not free)’ 라는 문구가 예전보다 더욱더 빛을 발한다.
<권영남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