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전 미국인을 경악케 한 사건을 들라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빼놓을 수 없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벌어진 일본군의 공격으로 2,280명의 미군이 죽고 1,109명이 부상당했으며 항공모함을 제외한 미 태평양 함대가 사실상 궤멸됐다.
진주만 기습이 끝난 지는 60년이 넘었지만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진주만 사태가 터지기 전 루즈벨트 대통령이 “우리 시대 최고 해군 전략가의 하나”라고 치켜세우며 별 4개를 달아준 허즈번드 킴믈 태평양 함대 사령관과 월터 쇼트 하와이 육군 사령관은 경계 태세를 태만히 했다는 이유로 강등 당한 후 치욕스런 제대를 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수십 년 만에 복권이 됐다. 연방 정부가 킴믈과 쇼트의 무죄를 밝혀달라는 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근무 태만’을 기록에서 삭제하고 강등된 계급을 다시 올려준 것이다.
진주만 사태의 장본인은 루즈벨트라는 주장도 있다. 로버트 스테닛은 그 동안 기밀 문서로 분류됐다 최근 공개된 정부 자료를 토대로 쓴 ‘기만의 날’(Day of Deceit)에서 루즈벨트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고립주의 분위기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의 적개심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 척 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현재 대다수 사가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시 조만간 일본이 어딘가를 공격할 것이며 그 중에는 진주만도 후보의 하나로 올랐던 것만은 사실이다. 단지 구체적으로 어느 날 어디를 어느 정도 규모로 공격할 것이냐 만이 문제였다.
요즘 연방 의회에서는 9·11 사태의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를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한창이다. 8일에는 청문회 출석을 거부해오던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 담당 보좌관이 나와 “부시 대통령이 테러 방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9·11 사태를 막을 묘책은 없었다”는 상식적인 발언을 했다.
지금은 모두 눈에 불을 켜고 테러를 막지 못한 책임자를 찾고 있지만 사건이 나기 전 테러 문제를 심각히 고려한 사람은 공화 민주 양당 어느 쪽에도 거의 없었다. 2000년 선거에서 테러는 거의 이슈로 등장하지 않았다. 노인들의 처방약 보조에 대한 관심이 테러 방지보다 10배는 높았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실세인 체니와 럼스펠드는 모두 냉전과 91년 이라크 전에 익숙한 인물들이며 라이스도 소련이 전공이다. 이런 사람들이 공직에 앉자마자 테러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을 리 없다.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리카의 대사관과 USS 코울을 공격하고 있었을 무렵 클린턴은 르윈스키 스캔들에 휘말려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양당 지도자 중 누구도 “우리 모두는 사실 테러에 대한 준비가 소홀했다”고 시인하지 못한다. 선거 해에 그런 말을 했다가 책임을 뒤집어쓸까 두려운 것이다. 진상 규명을 통해 향후 테러를 막기 위한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상대방 공격의 구실로 삼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민경훈 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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