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훈 미주본사 논설위원>
근대 국가 중 탄핵 제도가 가장 먼저 발달한 나라는 영국이다. 1376년 에드워드 3세의 신하 윌리엄을 의회가 탄핵한 것이 효시로 돼 있다. 탄핵 제도는 처음부터 당사자가 법적인 잘못을 저질렀느냐보다 국왕에 대한 정치 공세 수단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탄핵 당하면 파면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당시는 목이 잘리는 것이 상례였다. 17세기 영국 내전의 직접 원인도 의회가 국왕의 신임을 얻고 있던 스트래드포드 대신과 윌리엄 로드 대주교를 탄핵해 도끼로 목을 베자 이에 격분한 찰스 1세가 군대를 동원한 것이 빌미가 됐다. 찰스는 의회와의 전쟁에서 져 자신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탄핵에 따른 형벌의 무자비함에 대한 비판과 함께 탄핵은 점점 줄다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제도가 됐다.
영국의 법 전통을 계승한 미국은 하원이 탄핵하고 상원이 심판하는 영국의 탄핵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유죄가 확정되더라도 공직을 박탈하는 선에서 그치고 그 이외의 징벌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탄핵은 웬만한 일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았다. 지난 200여 년의 미 역사상 하원에서 탄핵 당한 대통령은 링컨의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과 빌 클린턴 둘뿐이며 그나마 둘 다 상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닉슨은 탄핵되기 전 사임했다).
한국이 때아닌 탄핵 소동으로 시끄럽다. 탄핵이 집권자의 법적 책임을 묻는 것보다는 정치 공세의 수단이지만 열린 우리당 지지 발언을 놓고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하는 것은 명분이 약하다는 게 대다수 국민과 법률가들의 생각이다.
그 정도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면 부정 선거와 철권 통치로 법 어기기를 밥먹듯 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열두 번도 탄핵 당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탄핵을 강행한 것은 총선을 앞두고 ‘반노’ 표를 모아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다.
탄핵을 가지고 잔꾀를 부리는 것은 여당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으로 선거법을 어긴 것은 잘못이며 불법 정치자금 규모가 야당의 1/10이 넘으면 물러나겠다는 발언은 경솔했다”고 한마디했으면 될 것을 “끝내 나는 잘못이 없다”고 우긴 것은 이 또한 탄핵을 자초함으로써 국민의 동정을 사 총선 판을 유리하게 짜보자는 책략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또 정치 개혁을 하겠다고 입만 열면 떠들던 사람들이 헌법이 보장한 국회의원의 탄핵권 행사를 히틀러와 비교하고 “쿠데타”라 부르며 몸으로 저지하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대통령을 하늘 같이 모시던 한국에서 야당의원들이 탄핵 안을 발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발전인 것도 같지만 해방 이후 수십 년째 해 오고 있는 단상 점거와 날치기 통과, 육탄전을 보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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