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라
지난해는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으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았다.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해 전세계 30여 국가에서 3,000여명의 감염자를 낳았고 이중 100여명이 생명을 잃었다.
지금까지 인류가 접해보지 못한 변종(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사스 파동을 지켜보며 지구상에 과연 ‘희망 바이러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하고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전염성이 사스의 10배쯤 되는 초강력 희망 바이러스가 생겨난다면 우리들의 삶은 좀 더 밝고 넉넉해 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람은 음식 없이는 40일, 물 없이는 3일, 공기 없이는 8분 이상을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이 없이는 단 1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귀가 솔깃해지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화려하고 멋진 것이거나 혹은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아주 소박하고 사소한 것이건 간에 나름대로의 희망을 간직한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 주변 사람까지도 덩달아 신바람 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새해가 시작되기 전 날, 조그만 선물꾸러미가 우리 집에 당도했다. 우리 부부가 섬기는 교회에서 작은 도움을 드리고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M선교사님이 보낸 것이다. 노란 바탕에 검정 땡땡이가 들어가 있는 치타(cheetah) 형상을 본떠 만든 컵받침(coaster)이었다. 표범을 닮은 치타 모습의 몸통에 양옆으로 가는 막대로 팔을 붙여 놓아 컵받침을 각각 3개씩 매달아 놓은 것이다. 동봉된 카드를 읽기도 전에 나는 그것이 선교사님이 돕고 있는 수단과 이집트에 있는 수많은 난민 캠프 중 한 곳에서 만들어진 수공예품임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숙인 듯한 치타의 얼굴에 그려진 두 눈이 슬픔에 젖어 있다고 느껴졌던 건 전쟁, 가난, 종교적 탄압 등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 캠프에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그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물이 배어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20여년 전에 M선교사님은 수단의 한 난민 캠프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은신처로서 적합한 시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강과 잇닿은 캠프에는 8,000여명의 난민들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에도 진흙 구덩이 속에서 아기들이 태어나고 독감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을 목격하면서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을 수 없었노라고. 그 후로 지금까지 협력자들과 함께 난민구호와 교육, 복음전파에 최선을 다 해오고 있다.
그 분은 늘 내게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희망을 전해주는 것이며 배고픔이나 추위,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희망 없는 삶이라고.
사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돌아보면 적지 않은 수의 희망 보균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불황으로 운영하던 건설업체가 부도가 나고 남편은 감옥에 있다면서도 늘 환한 웃음으로 시장 한 귀퉁이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팔던 아줌마, 장애인의 몸으로 재활의 의지를 불태우며 양말 행상을 하던 아저씨, 팔순의 나이는 한 쪽으로 제켜 놓은 채 열심히 나물을 팔던 할머니. 내가 그들에게서 산 것은 단순한 먹거리, 몇 켤레의 양말이 아니라 삶을 향한 용기와 의지였다. 또 다른 내일을 꿈꾸는 희망이었다.
희망을 품지 않은 삶은 진흙 구덩이에서 눈, 코만 내놓고 끔뻑거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희망을 꿈꿀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한 가닥 빛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과도 같으리라. 포기하지 않으려는 희망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화되고 있는 것일 게다.
하여 나는 세상을 바꿔 나갈 힘을 나눠 줄 초강력 희망 바이러스 보균자들이 들끓는 세상을 오늘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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