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함께 한인타운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날이면 운전을 하는 남편 옆에 앉아 있다가 무의식중에 차 문이 잠겨있나 확인을 하게 된다.
어둡고 한적한 다리 밑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문 잠근 나의 차안에서 보게 되는 LA의 밤과 나의 가족 사이에는 유리창 한 장의 물리적 거리밖에 없을 텐데, 내가 소유하는 나의 공간과 그 곳은 내게 있어서 아득히 먼 거리가 되고 그 거리감을 느끼는 나 자신으로 인해 마음이 씁쓸해지고는 한다.
그 밤거리를 걸어서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근 이십년 전, 이민 첫해에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엔 페어팩스 하이스쿨의 어덜트 스쿨로 영어를 배우러 다니던 때였다. 그때 같은 반에는 페인트 일을 하신다는 어떤 아저씨와 우리 식구들만 한국인이고 여러 연령층의 남미 사람들로 가득 했었다.
그 중에는 할리웃에서 미용사로 일한다는 빅터 아저씨도 있었다. 키가 크고 미남인데다 체격이 당당해서 조폭의 중간 보스쯤으로 보이던 아저씨는 주변에 항상 몇몇 남미 청년들을 거느리고 징박은 가죽구두와 가죽잠바로 멋을 내고 있었다.
근 일년을 같이 공부하는 동안 빅터 아저씨는 고모댁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다 배인 내 옷의 기름냄새에 웃기도 하고 나를 기특해 하기도 하였다.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서 공부를 하다가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면 버스를 기다리는 내 앞을 구형 무스탕 컨버터블에 일당을 가득 싣고 지나며 BYE를 외쳐댔었다.
그 후 근 오륙년이 지나 대학 졸업반 때쯤이었을까, 어느 날 밤 멜로즈 애비뉴를 지나다 신호등에 멈춰 서서 무심코 좌회전 차량을 쳐다보니, 앗! 빅터 아저씨였다. 차는 바뀌었으나 예의 청년들을 너덧 태우고 운전석에서 함박 웃음을 웃으며 얼른 유리창을 내렸다. 어찌나 반가운지 우리는 신호를 기다리며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고개를 길게 뺐다.
영어가 많이 늘었구나, 공부는 잘하고 있냐 라며 예의 그 기특해 하는 웃음을 웃고 안부를 묻는 아저씨와 나의 차 뒤에는 어느덧 바뀐 신호등 아래로 차들이 밀리고, 우리는 다시 손을 흔들며 작별을 했다. 몇 년 전에는 몇 시간씩 옆에 앉아서 공부를 하던 아저씨와 그렇게 몇십초 만에 길 위의 해후를 마치노라니 그 멜로즈 애비뉴를 걷고 버스를 타며 다니던 때가 생각이 났었다.
사람들은 내가 이민 초년생이라 멋모르고 LA의 밤거리를 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만큼 내 속이 태평스러웠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연히 아저씨를 만났을 때 차를 세우고 단 오분도 안부를 묻지 못한 나는, 아저씨 차에 가득하던 남미 청년들이 무서웠던 것일까 아니면 밤거리 그 자체가 무서웠던 것일까.
이제는 외곽에 살면서 내가 걸어다니던 거리를 차 문을 잠그고 지나서 가족외식을 나오는 나는, 다시 빅터 아저씨를 만나면 어려운 시절을 지켜보셨던 아저씨에게 기쁘게 우리 아이들을 인사시키러 차를 세울 수 있으려나?
요즘 신문지상에는 다운타운과 할리웃, 그리고 한인타운의 재개발 계획들이 자주 눈에 띈다. 주상복합 건물이니 문화 공간을 겸비한 거리니 또는 상권이 몰린 새 경제의 중심이니 하는 말은 시민들이 밤낮으로 걸으며 마음놓고 살 수 있는 활기차고 안전한 도시의 거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흐르고 세태가 변하지만, 반가운 사람들과 아이들을 키우는 여러 가족들이 섞여서 사는 곳이 또한 이 도시이고 보면 그런 계획들이야말로 조금 늦은 감이 있다. LA의 밤거리에서 다시 빅터 아저씨를 만나게 되면 망설이지 않고 멈춰 서서 주스 한잔이라도 대접할 수 있는 곳이 즐비한, 그런 LA의 저녁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 본다.
고경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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