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다. 새해가 되면 떠오르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일 것이다. 미국 땅에서 모일 친척이 있다고는 해도 고국이 아닌 이곳에서 느끼는 명절의 기분은 한국의 느낌과는 다르다.
살아가는 동안 습득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건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 되기도 하다.
잔인한 이야기겠지만 감동을 위하여 때론 격리될 필요가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전방으로 전전해야하는 엄마는 한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은 남매를 혼자 키우기 힘이 들어 나를 잠시 외할머니 댁에 맡겼던 것이다.
애나 어른이나 놀 거리가 그리 흔치 않았던 그 시절 외할머니는 아침상을 물리면 의례 방석을 방구들에 펼쳐놓고 화투장을 떼시며 ‘오늘은 손님이 오시겠군’ ‘오늘은 국수를 먹는 날이네’ 하시며 그날의 운수를 점치셨다. 그리고는 어떤 날은 그 화투장을 들고 골목길을 따라 어디론가 나를 데리고 가셨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간 낯선 집은 가운데 큰 마루가 있고 오른 쪽에 툇마루가 있는 방이 보였다. 툇마루 밑에는 뜨거운 김이 오르는 알루미늄 솥이 얹혀진 아궁이가 있었고 겨울 햇살은 커다란 유리창을 뚫고 마루에 환하게 비쳤다.방문으로 들어서니 이미 와 있던 다른 동네 분들이 우리 할머니를 반기신다.
이 태란 권사, 떡집 할머니, 귀대 어멈, 이 모두가 외할머니가 붙이던 명칭이었고 나도 외할머니 따라 그 분들의 이름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랫목에 앉으라며 자리를 비켜주는 그들은 투박하고 거칠한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기도 했고 부시럭 털 조끼 주머니에서 비닐이 녹아 붙어버린 박하 사탕을 내 손에 집어 주기도 하셨다.
국방색 모포가 깔려지고 귀퉁이가 반질반질한 화투장이 돌려졌다. 십 원 짜리 동전이 잘그락 거리는 그 옆에서 내가 맡은 일은 쭈그리고 앉아 종이에 연필로 점수를 적는 일이다. 비록 십 원 짜리 내기에 불과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지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러다 배가 출출해지면 그 집주인은 물이 설설 끓는 솥뚜껑을 열어 푹 삶아진 고구마를 양푼에 담아 내오신다. 새끼 병아리 궁둥이 같은 샛노란 고구마 속은 달기도 무지 달았다. 어떤 날은 장국 국수에 사큼하게 삭은 김장 김치를 썰어 내놓기도 했다. 장국국물까지 들여 마시던 내 입 언저리는 매운 맛에 벌개져 얼얼했다.
이젠 생각조차 바래 지기도 하련만 명절 때가 되면 외할머니를 따라 다니며 얻어먹었던 꼬깃꼬깃한 셀렘민트 껌이니 눌어붙은 박하사탕의 단맛이 그리움의 체에 걸러진 기억으로 눈가에 아름아름 눈물이 고여진다. 나를 키워준 할머니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애끓는 아픔 때문이리라.
마음만 먹는 다면 갈 곳도, 볼거리도 풍부한 미국에서 심심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그런데도 꼬깃꼬깃 층층이 절여진 낡고 촌스런 시절로 울컥 생목이 잠기게 되는 것은 시간 위에 새겨진 그리움이라는 특별함 때문이다.
그 특별함은 그저 평면일 수밖에 없는 시간 위에 각을 새기고 골이 패이게 한다.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거리 너머에 살고 있어 앞으로 고작 만나봐야 몇 번밖에 되지 않을 연락 끊긴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 한 통 보내는 여유 또한 을씨년스런 겨울을 나는 한 가지 방법이 되리라.
권소희
약 력
▲ 2002년 제4회 재외동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 2002년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소설 부문 입상
▲ 2001년 미주 크리스찬 문협 주최 신인상 시 부문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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