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병대원으로 서울시청 탈환한 최만호 옹의 6.25
“용산의 국방부를 탈환하고 시청으로 가니 정문에 스탈린,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대. BAL 자동소총에 16발 든 탄창을 끼워 그냥 갈겨버렸어. 시청을 완전 장악한 다음 고춘학 향도와 태극기를 꽂았어. 그때 총탄자국이 지금도 남아있을 거야." 한국전쟁시 함흥·도솔산·금곡리 전투등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세운 혁혁한 전공으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최만호 예비역 하사(79. 애난데일 노인아파트 거주)는 아직도 당시의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소대가 중앙청을, 우리 3소대가 시청을 맡았어. 중앙청에 국기 꽂는 유명한 사진 있잖아. 한 명은 양병수라고 선임하사관이고 하나는 최국방이란 내 동기야."
해병 1연대 3소대 소속인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1년여동안 불타는 전장의 최극점에 섰던 건 오직‘사나이의 오기’ 때문이었다.
황해도 금천군 생인 그는 해방 직후 갓 결혼한 부인과 월남, 서울서 외삼촌의 제과점 일을 돕다 6.25 전쟁을 만났다. 마산까지 피난을 갔다. 그러나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일부 무너뜨리며 밀고 들어왔다.
“그냥 죽을 순 없다. 군에 가 싸워서 죽는 게 사나이"라고 결심한 그는 바로 해병 3기생으로 자원입대했다. 어린 아들과 임신중이던 부인은 마산 피난민 수용소에 맡기고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바쁜 놈이지. 마누라가 평생을 속으로 날 욕하며 살았겠지."
전원 지원병으로 구성된 3기생은 247명. 전우들은 도처에서 죽어갔다. 최옹이 가장 잊지 못하는 전장도 바로 서울 탈환 후 망우리 고개 근처 금곡리에서 있었던 전투.
“3소대 전우 7명이 죽었어. 처참했지. 근데 우리가 퇴각을 하는데 누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고지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혼자 올라가보니 시청을 함께 탈환한 고춘학이야. 총을 메고 그를 업어 8부 능선을 내려오는데 저쪽(인민군)에서 총질을 마구 해대. 총에 맞은 척 드러누워 있다 필사적으로 산을 넘었어. 어찌나 무거운지 내려오자말자 쓰리쿼터에 패대기를 쳤어."
그의 영웅적인 금곡리 전투 일화는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됐다 한다.
그는 입대 이듬해인 51년 11월 사병 전역을 하고 곧바로 경리하사관학교에 입교, 수료한 후 부산에서 복무하다 52년 11월 가족 부양 때문에 의가사 제대했다.
군복을 벗은 지 반세기. 최옹은 해마다 6월이면 50여년전 그 전장의 짙은 화약 내음을 맡으며 사라져간 전우들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여든을 한해 앞둔 노병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고춘학이나 동기들 얼굴한번 봤으면 원이 없을 것"이라는 최옹은“아마 살아있는 동기들은 몇 안될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부인 이숙자씨(74)와 2남 2녀를 둔 그는 80년 큰 딸의 초청으로 일가족이 이민왔으며 현재 버지니아 애난데일의 한 노인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수훈 사실을 모르고 있다 뒤늦은 98년 충무무공훈장을 찾은 최옹은“그동안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며“전쟁 희생자와 유공자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일침을 놓았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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