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10억원 이하인 작품을 두고 ‘저예산영화’라고 한다. 적은 돈으로 찍었다고 붙인 말이겠지만 다분히 경시의 시각을 깔고 있다. ‘싸구려’나 ‘초라한’이라는.
스타 배우도 없다. 당연히 조연이나 신인 배우를 기용하다 보니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제작비가 적으니 화려한 영상이나 큰 스케일이 아니다. 제작자부터 어떻게 하면 아이디어 하나로 먹을까 생각한다. 아니면 센세이셔널리즘을 살려볼까 생각한다. ‘노랑머리’가 그랬고 어떻게 보면 ‘섬’이 그랬다.
한국에서는 저예산영화일수록 투기적이다. 흥행이 되면 다행이고 안되도 제작비가 몇푼 안되니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오직 아이디어와 소재 하나에만 집착한다. 평범해서는 안된다. 튀어야 한다. 그리고 날카롭다. 현실비판적이다. 때론 아주 엉뚱한 발상도 나온다.
이런 제작관행이 때론 한국 영화의 발전에 긍정적 역할도 한다. 할리우드 유사품이 아니면, 자신의 색깔보다는 철저히 기획된 상품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면 데뷰가 어려운 현실에서 저예산영화는 개성있는 신인 감독에게 기회를 준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기에 비교적 자유롭고 자신의 상상력과 개성을 드러낸다. 물론 대부분 그 실험과 상상력은 실패로 끝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1996년 김용태 감독이 ‘미지왕’이란 영화를 들고 나왔다. 결혼식장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감독은 기상천외한 형식과 발상, 표현법으로 담았다. 모든 영화적 습관을 부정하고 영화의 감정이입을 막는 브레히트적 소격효과를 사용한, 그야말로 낯설고 황당한 영화였다.
‘영화가 꼭 문법적인 문장일 필요는 없다’는 발상은 할리우드 문법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 관객에게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영화’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2년전 장진 감독도 그랬다. 정말 기막히게 재수없이 얽혀드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우화적이고 넌센스적으로 담은 ‘기막한 사내들’은 관객에게는 ‘기막힌 영화’로 평가됐다.
그렇다고 이런 영화들이 3류 싸구려인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미친놈 취급을 받는 것은 억울하다. 그속에는 주류영화가 할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새로운 상상력과 색깔이 있다. 그것을 영화적 장치 속에 적절히 활용할 때 한국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색깔을 다양하게 만든다.
‘기막힌 사내들’에서 영화적 틀을 깨달았다는 장진은 두번째 영화 ‘간첩 리철진’으로 한국 영화에 새로운 코미디를 열었다. 엽기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김기덕 감독은 ‘섬’이 베니스영화제 본선에 나감으로써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인정받았다.
또하나의 저예산영화로 ‘베니싱 트윈’(감독 윤태용) 과 ‘공포택시’(감독 허승준) 가 나왔다. 하나는 ‘노랑머리’로 돈을 번 제작사의 것이고, 하나는 ‘간첩 리철진’으로 재미를 본 제작사의 것이다. 색깔과 장르는 전혀 다르지만 둘은 저예산영화의 툭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자극적인 소재, 그리고 서투른 솜씨.
‘베니싱 트윈’은 임신중에 쌍둥이 중 하나가 사라지는 현상을 모티프로 여성의 이중의식과 성의 자유를 연결시킨 섹스 미스터리고 ‘공포택시’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귀신이 돼 나타나 악을 징벌한다는 코믹 공포물이다.
다중적인 장르를 단 것 만큼이나 영화는 실험적이고 엉뚱하다. 문제는 그 엉뚱함과 실험성이 영화적 리듬이나 전략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업성을 의식한 자극적 노출과 스피드를 장기로 한 액션이란 상투성을 결합시켰다. 그것이 감독의 용기 부족이든, 능력 부족이든, 제작자의 입김이든 실험적 저예산영화를 망치는 일이다.
‘공포택시’ 제작자 씨네월드의 이준익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그냥 아이디어 하나로 밀어부쳤다. 제작비도 적고 해서 그것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니어서 몇가지 요구도 했다. 많이 배웠다. 저예산영화일수록 큰 영화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영화에서는‘싼게 비지떡’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비지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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