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방에서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친다. 반구형 공간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더 크게 울리는 소리가, 미처 가시지 않은 앞선 걸음의 잔향에 얹히면서 청각적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공간적 서사의 절정을 향해 다가가는 동선을 청각적으로 치환한 것만 같다. 걷는 이는 소용돌이치는 소리를 진정시키려 멈춰 선다. 정면을 보니 뚫린 벽면 사이로 주위의 자연이 보인다. 지름 25m의 돔 중앙에서 점차 흩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자연스레 나 자신과 눈앞의 자연에 집중하게 된다. ‘현재에 몰입’하고 ‘자연과 교감’한다는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 ‘그라운드’의 주제에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다.
서울에서 고속열차로 50분이면 갈 수 있는 원주는 자연과 문화를 한데 즐길 수 있는 목적지다. 거대한 석제 ‘이글루’를 연상시키는 뮤지엄 산 그라운드, 철제 ‘빙하’ 속 미술관, 계절 명소가 된 인공 빙벽이 있다. 실내 동선이 주라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는 요즘도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다.
■ 안도 다다오의 걸작, 뮤지엄 산
원주 문화여행의 시작은 한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뮤지엄 산이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의 대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산상(山上) 전원형 미술관이다. 산(SAN)에는 공간(Space)·예술(Art)·자연(Nature)이란 의미도 담겼다.
‘소통을 위한 단절’이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뮤지엄 산은 해발 275m 산자락에 틀어박혀 있다. 접근성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장소이지만, 고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안도 다다오에게 건축을 의뢰하면서 “세상에 없던 새로운 공간이라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라며 입지를 고수했다고 한다. 뮤지엄 산이 매년 20만여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는 지역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현재 이 고문의 믿음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노출 콘크리트 구조체를 파주석으로 둘러싼 ‘박스 인 박스(Box in Box)’ 형태다. 이중 구조와 절제된 형태미로 건축물이 자연 속에 녹아든 예술 작품처럼 느껴진다. 처마와 벽 사이로 들어오는 자연 채광이 시간대별로 다양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삼각형·사각형·원형으로 구성된 갤러리 연결 통로마다 하늘(원), 땅(사각), 인간(삼각)을 상징하는 공간이 배치돼 관람 동선 곳곳에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중 하나인 ‘삼각 코트’는 기념사진 명소로도 꼽힌다.
지난해 6월 개관한 그라운드는 가장 최근에 지어진 공간이다. 뮤지엄 산의 설계자 안도 다다오와 조각·설치 미술가 안토니 곰리가 손을 잡고 창조했다. 산비탈 지면 아래 설치된 거대한 돔이다. 지하이기에 고립되지만 비탈이기에 인근 산맥이 시원하게 보인다. 뮤지엄 산의 다른 공간과도 동떨어져 그라운드 공간, 내부 작품, 눈앞의 자연, 나 자신만이 남는다. ‘소통을 위한 단절’이 절정에 달한다.
내부 작품은 픽셀로 그린 사람 형태의 조형 7점으로 구성된 블록웍스(Blockworks)다. 안도의 콘크리트 공간과 곰리의 블록 인간 덕에 다른 세계로 이동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인위적인 장치 없이 오직 돔의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음향 효과가 이 느낌을 극대화한다. 위치마다 다르게 울리는 소리를 탐구하는 재미가 있다.
뮤지엄 산이 개관 5주년과 10주년에 선보인 ‘명상’ 공간은 안도 건축 철학의 정수가 응축돼 있다. 10주년인 2023년 조각정원에 공개한 ‘빛의 공간’은 닫힌 콘크리트 정육면체 건물 천장에 열십자 형태 틈을 낸 파빌리온이다. 내부로 쏟아지는 십자형 빛기둥이 작은 예배당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5주년 기념으로 건립된 명상관은 그라운드처럼 돔 형태로 설계됐다. 돔 천장에 세로로 긴 창이 있어 해가 머리 위로 솟는 정오에는 내부를 정확히 양분하는 빛의 기둥이 떨어진다. 시간 흐름에 따라 실내 분위기도 섬세하게 변한다. 명상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시간대에 따라 사전 녹음된 음원 명상과 실시간으로 연주되는 ‘라이브 싱잉볼’ 명상을 체험할 수 있다. 시간이 맞다면 싱잉볼 명상을 추천한다. 그라운드의 백미가 내부에서 메아리치는 소리라면 명상관은 공명하는 소리다. 녹음된 음원과 울림의 깊이가 다르다.
명상관의 완만한 돔은 야외 ‘돌의 정원’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신라 고분을 떠올리게 하는 9개의 돌무더기로 꾸민 이 정원은 눈 덮인 겨울철에 특히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돌의 정원과 인접한 또 다른 대표 공간은 제임스터렐관. 자연광과 인공광을 망라해 빛의 활용을 극대화한 공간. 입장하자마자 마주하는 스카이스페이스(하늘공간)는 한없이 파란 하늘을 공간의 일부로 끌어왔다. 타원형 천장 구멍으로 자연 채광을 활용한 것. 원형 공간에서 앉은 위치에 따라 보이는 하늘의 모양이 다르다. 입구 근처에선 타원이 완벽한 원으로 보인다.
‘간츠펠트(완전한 영역)’도 한번 경험하면 잊히지 않는 공간이다. 구조화되지 않은 자극에 노출되거나 감각이 차단된 뇌가 환각 등 거짓 신호를 만들어내는 것을 간츠펠트 효과라 한다. 모서리 없는 순백의 방에 균질한 조명을 투사한 작품으로 관람객이 직접 방 안에 들어가 관람한다. 입장하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 들어선 것 같다. 작가가 비행 중 구름에 갇혀 공간지각을 상실한 경험에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간츠펠트 안에서 연기나 증기를 분사하는 것도 아닌데 시야가 늘 뿌옇다. 빛의 파장을 이용한 기법이라고 한다.
본관 앞마당 격인 워터가든 수면은 본관 건물과 하늘, 주변 산을 거울처럼 비춘다. 수면 아래에 깔린 검은 해미석이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깊게 만든다. 워터가든의 붉은 ‘아치웨이’를 통과해 본관에 들어서면 이인희 고문이 생전 수집한 미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 구역은 크게 백남준의 미디어아트를 전시한 백남준관, 회화 판화 등 소장품이 주기적으로 교체 전시되는 청조갤러리 I~III으로 나뉜다. 제지업에 뿌리를 둔 한솔그룹 시설답게 종이박물관과 중앙정원 격인 파피루스 온실도 있다.
■ 원주의 명물 ‘빙하’와 ‘빙벽’뮤지엄 산에서 차로 10분 남짓 이동하면 새로운 문화 랜드마크로 떠오른 빙하미술관에 도착한다. 지난해 5월 개관한 빙하미술관은 이름처럼 거대한 빙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외관이다. 널찍한 연못 위로 솟은 거대한 금속 빙하는 언뜻 보기에 조형물 같지만 실은 이 자체가 전시관이다. 조금 떨어진 지점에 있는 출입구를 통해 지하로 진입하기에 알아채기 어렵다. 관람을 마치고 외관을 자세히 둘러보고서야 자신이 방금까지 ‘빙하’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구 온난화 시대에 사라져가는 빙하를 예술로 형상화해 환경 변화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건축 취지다. 설립자 부부가 재생에너지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미술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균열과 단차로 이루어진 외벽은 빛을 산란시킨다. 관람 동선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반짝임과 그림자로 녹아내리는 빙하를 표현하려고 했다. 특유의 복잡함 덕에 20여 명의 예술가가 직접 외벽 공사를 맡았다. 다음 달 26일까지 진행되는 공식 개관전 ‘Beyond Black: Light, Time, Memory(블랙을 넘어: 빛, 시간 그리고 기억)’에선 알도 탐벨리니(1930~2020·미국), 카민 르차이프라싯(태국), 이이남(한국) 등 3국 미디어아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판대 아이스파크는 원주시 지정면 판대리 절벽에 매 겨울 조성되는 인공 빙벽 등반장이다. 국내 빙벽 등반 애호가 사이에서 성지로 통한다. 2002년 원주클라이머스 산악회원들이 인근 섬강 상류의 물을 절벽으로 끌어올려 처음 조성한 이래 매년 새해 무렵 얼음을 얼려 빙벽장을 개장한다. 가로 200m·높이 100m로 인공 빙벽으로는 세계에서 손꼽힐 크기라고 한다.
거대한 빙벽은 익스트림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관광객의 눈길도 사로잡았다. 직접 얼음벽을 타는 등반객보다 장관을 눈에 담으려는 구경꾼이 더 많을 정도다. 현지 사정에 밝은 택시기사들에 따르면 눈과 얼음을 볼 기회가 없는 동남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한다.
빙벽을 조망할 수 있는 카페 ‘스톤크릭’도 들어섰다. 칼바람을 피해 눈을 찌를 듯 아름다운 얼음 절벽과 이를 오르는 도전자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콘텐츠다. 카페 건물 두 동을 띄어놓아 빙벽 풍경을 가리지 않게 한 점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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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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