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역사에 총통으로 불린 유명한 사람이 둘 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다. 1922년 10월 31일에 무솔리니가 총리직에 전격 임명됐을 때만 해도 그로 인해 세계사의 판도가 바뀔 것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무솔리니의 시작은 극히 미미했다. 전직 언론인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린 무솔리니는 1919년 3월에 고향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투쟁 결사’를 조직했다. 빈부와 계급의 차이를 넘어 과거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는 진정한 민족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그에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모든 혼란의 원인이었고 의회는 불화와 정쟁의 온상일 뿐이었다.
야망의 실현을 위해 무솔리니는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동물적인 권력 감각을 가진 그는 예비역 군인들을 모집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지만 전리품 분배에서는 소외된 이탈리아에서 가장 울분에 찬 집단이 바로 퇴역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태로 구성된 ‘검은셔츠단’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국민에게 질서 회복을 약속했다. 공산혁명을 두려워하던 정부는 조직화된 폭력을 방조했고 질서를 염원하던 국민들은 환호했다. 2년 만에 이 테러 조직은 ‘민족파시스트당’으로 변신했다.
        
        파시즘은 두 가지 점에서 호소력이 있었다. 고대 로마 황제의 지팡이를 지칭하는 ‘파쇼(Fascio)’는 이탈리아인들에게 황금시대 역사의 재현과 강력한 권력에 기초한 질서 회복을 의미했다. 1922년 10월 27일 ‘로마진군’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감행한 무솔리니는 이틀 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독대한 후 사실상 권력 장악에 성공했다.
군부와 자본가·우익의 지지 속에 그는 마침내 총리 자리에 올라섰다. 경제 불안과 정치 혼란이 아니었다면, 화려한 상징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맹목적인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면 무솔리니의 집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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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근 /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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