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공기는 유난히 다르다. 아침의 빛은 부드럽고, 오후의 바람은 어느새 긴 여름의 흔적을 말없이 털어낸다. 붉고, 노랗고, 갈색으로 물드는 그 변화는 자연의 노년기이자 완성의 시간이다.
시월은 그렇게, 화려함이 아니라 고요한 성숙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우리는 흔히 봄을 시작의 계절, 여름을 성장의 계절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시월은 그 모든 여정의 ‘의미를 정리하는 계절’이라 할 수 있다.
빛과 바람, 그리고 고요함의 시작으로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절묘한 계절의 균형 속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시월의 하늘 아래 서면, 나는 문득 묻는다. “나는 올해 얼마나 익어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시월이 내게 건네는 가장 조용한 철학적 사유에 놓이게 된다.
시월은 익어가는 자연이 내게 일깨워주는 성숙의 시간이며, 시월의 자연은 ‘결실’의 언어로 말한다. 햇살의 뜨거움, 바람의 흔들림, 그리고 밤의 추위가 함께 만든 조화의 결과다. 인간의 성숙도 다르지 않다. 나는 가끔 벼 이삭을 바라보며 인생을 배운다.
이삭이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세월을 겪을수록 겸손해진다. 젊은 날의 자만과 속도는 어느덧 시월의 바람 속에서 잦아들고, 그 자리에 잔잔한 이해와 포용이 자리한다. 시월은 그렇게 ‘성숙의 미학’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성숙이란 단어는 완성이라기보다 ‘채워지며 비워지는’ 역설 속에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을 알고, 동시에 더 많은 것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낙엽은 우리에게 ‘사라짐’의 미학을 가르친다.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은 살기 위한 선택이다. 모든 잎을 지고 나서야, 나무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견딜 수 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로 버려야 산다. 과거의 후회, 불필요한 관계, 미련스러운 욕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다시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낙엽은 우리에게 ‘비움의 용기’를 속삭인다. 나는 언젠가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순간, 한 장의 낙엽이 내 무릎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그것은 마치 세월의 손길 같았다.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시간의 형상. 그 짧은 찰나가 내게 말했다. “모든 사라짐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너를 다음 계절로 이끈다.”고...
시월이 끝나갈 때쯤이면, 나무들은 거의 다 벗겨지고, 하늘은 더욱 투명해진다. 세상은 점점 비워지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더 충만해진다. 그것이 시월이 내게 남긴 인생의 역설이다. 비워야 채워지고, 떠나야 머무른다. 시월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 청춘의 여름을 지나, 성숙의 가을에 다다른 인간은 결국 자기 안의 평화를 찾는다.
그 평화는 외부의 성공이나 소유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내려 놓음과 고요함 속에서 피어난다. 나는 시월을 닮고 싶다. 더 이상 조급하지 않고, 더 이상 화려함을 좇지 않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시월은 말없이 그 길을 가르친다.
마지막 낙엽이 떨어질 때, 그것은 이별의 소리가 아니라, “내년에도 다시 만나자”는 자연의 속삭임이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답한다. “그래, 나도 또 다시 익어가겠다.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단단하게.” ...그래서 시월은 내게 단순한 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철학이고, 한 권의 인생 교과서다.
세월 속에서 익어가는 모든 존재에게 시월은 속삭인다. “지금 이 순간이 너의 가장 아름다운 때다.”라고... 오늘도 나는 시월의 바람 속에서, 조용히 나를 사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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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화/전성결대학장·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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