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셔 이벨 극장의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단 하루의 무대를 위해 우리는 꼬박 일 년을 준비했다.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고, 결과는 분명히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값진 성과는 2세?3세 제자들이 무대를 통해 민족무용의 역사와 의미를 마음 깊이 새겨 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눈빛 속에 남은 이해와 자부심은 어느 수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결실이었다. 그날의 박수는 한 편의 공연을 넘어 세대를 잇는 약속이 되었다.
그 약속을 확인한 다음, 조명이 꺼지고 객석이 서서히 비어갈 때 비로소 성찰이 찾아온다. 오랜 시간 흘린 땀과 준비가 단 한 번의 무대로 끝난다는 허허로움이 남고, 곧 현실이 밀려온다. 예상을 넘어 오른 대관료와 부대비용, 경기 침체로 줄어든 후원, 함께 짐을 나눠 들던 협연마저 성사되지 못한 아쉬움이 손익계산서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적자를 감내하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정을 헤아리고도 무대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무대는 단순한 기술의 경연장이 아니라 역사를 이어 숨 쉬게 하는 자리다. 청소년들이 전통무용을 배우는 과정은 동작을 익히는 훈련을 넘어선다. 일제강점기라는 핍박 속에서도 전통을 지켜낸 이들의 고단한 발자취를 이해하는 일, 그 위에 오늘의 춤과 내일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일이다. 그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이 춤이 아름다움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존재를 지켜낸 언어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에게 광복은 과거의 기념일로 박제된 사건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존재 이유를 규정하는 살아 있는 정신이다. LA라는 낯설고도 익숙한 이 땅에서 전통의 맥을 되살리는 일은 지역 축제의 한 장면이 아니라 공동체의 뿌리를 돌보는 공공의 일이다. 무대는 담장이 없는 학교이고, 레퍼토리는 이름 없는 교과서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소속감을 배우고, 어른들은 책임을 되새긴다.
물론 예술의 길은 때로 비효율로 보인다. 당장의 수지로만 따지면 멈추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문화의 지속 가능성은 단기 손익표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정체성을 지키는 일, 기억을 다음 세대에 안전하게 건네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공동체의 품격은 오래 축적되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무대 위에서 이어지는 한 동작, 한 호흡이 언젠가 누군가의 세계관을 바꾸고, 그가 또 다른 이에게 손을 내미는 연결이 된다. 문화는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회를 단단하게 만든다.
빈 객석을 바라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의 적자를 감수하면서 무엇을 지켜냈는가.” 답은 언제나 한 가지다. 불씨다. 환호가 사라진 뒤에도 그 불씨는 잿빛 속에서 조용히 타오른다.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다음 공연을 계획하고, 아이들의 발놀림을 다듬고, 전승의 문장을 한 줄 더 정교하게 고친다. 예술은 사치가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에게 거는 장기 투자다. 전통은 장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뿌리다.
이 길은 홀로 걷는 길이 아니다. 누군가는 시간을, 누군가는 재능을, 또 누군가는 박수와 격려를 보탠다. 공연장을 찾아오는 발걸음, 아이들의 배움을 지켜보는 눈빛, 한 장의 프로그램북을 간직해 두는 마음, 그 모든 것이 전승의 회로를 완성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보다 지속 가능한 동행이다. 공동체가 함께 지켜낼 때, 예술의 불씨는 더욱 밝아진다.
마지막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나는 다시 다짐한다. 이 무대를 붙드는 것은 나의 고집이 아니라 우리의 사명이다. 오늘의 공연이 일 년의 수고로 완성되었다면, 내일의 공연은 오늘의 다짐 위에서 시작된다. 언젠가 지금의 제자들이 우리의 자리를 이어 받아 또 다른 세대의 가슴에 같은 문장을 새길 것이다. “그들이 지켜냈기에 우리가 있다.” 그 말을 듣는 날까지 나는 이 무대를 계속 올리겠다. 그것이 광복의 뜻을 오늘에 잇는 길이며, 다음 세대와 맺은 가장 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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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화 김응화 무용연구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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