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가 밤길을 거닐다 산짐승들에게 위협을 당했을 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구해주고는 지옥의 문으로 안내한다. 그 입구에는 지옥을 묘사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이 곳에 들어오는 그대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는 결국, 지옥은 일말의 희망도 없는 곳임을 상징하며, 희망을 잃은 삶은 곧 죽음보다 더 깊은 수렁임을 암시하고 있다.
희망은 이렇듯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마지막 버팀목, 최후의 보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70-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 중에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희망가’가 있다.
이 곡은 원래 미국의 복음성가로서 제레미아 잉걸스(1764-1838)가 1805년에 발행한 ‘크리스천 하모니’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건너 와서는 암울했던 일제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살아가던 젊은이들의 위로송이 되었다.
구성지게 늘어지고 지독하게 슬픈 가락이지만, 마디마디 부를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짓밟혀도 눌리지 않는 잡초같은 생명력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잡초같은 생명력’, 그게 희망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처절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낙담, 분노, 두려움은 어찌보면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감정이다. 위로한답시고 “희망을 잃지 마라”라고 건네는 말은 듣기에 따라 더 잔인할 수 있다.
오히려 말없이 손잡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더 위안이 되고 힘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희망은 말로 재단하듯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실의 밭을 갈아엎고 미래의 화단에 꽃씨를 뿌리는 형이상학적인 꿈같은 것이라고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이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희망은 오히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잉태된다고 생각한다.
고대 철학자 키케로는 ‘Dum Spiro Spero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라고 했다. 나아가 이해인 수녀는 암투병 중에 펴낸 시집에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다’라는 메세지를 담았다.
이렇듯 희망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구름이나 바람처럼 떠돌아 다니는 잡히지 않는 허상이 아니라, 공기와 빛처럼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 가까이에서 공생한다.
희망은 우리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고, 애써 갈구하지 않아도 된다. 희망은 새벽처럼 다가온다고 믿는다.
지난 밤에 수많은 별이 지고 사라졌음을 생각하면,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떠 맞이하는 새로운 하루는 기적이고 감사의 시작점이다. 희망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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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김/전 재미부동산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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