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타고났다. 하나님이 주신 대륙을 온전히 뒤덮어야 하는 소명이 있다. 신에게 선택받은 미국인이 미주 대륙 전체에 자유를 전파해야만 한다. 1845년 12월27일 미국의 민주당계 신문인 ‘뉴욕 모닝 뉴스’에 사주인 존 오설리번(당시 32세)이 쓴 칼럼의 골자다. 신이 영토 팽창의 사명을 부여했다는 얘기다. 법학을 공부한 오설리번의 이런 주장은 처음이 아니었다. 1839년에도 직접 창간한 ‘데모크래틱 뷰’에 비슷한 내용을 실었다. 다만 ‘명백한 운명’ 대신 ‘신성한 운명(devine destiny)’이라는 용어를 썼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 사용도 실은 두 번째였다. 1845년 8월 ‘합병’이라는 제목 아래 텍사스를 멕시코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명백한 운명’의 두 번째 기사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내용은 북미대륙 전체의 미국화. 영국령 캐나다와의 국경선 확정 마무리 단계에서 그는 초강경론을 펼쳤다. 오리건과 텍사스를 확보한 다음 캘리포니아를 거쳐 캐나다 전부를 갖자는 주장은 과격하다고 평가받았지만 결국 미국은 대부분 이뤄냈다. 명백한 운명은 멕시코와 전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는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유타,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등을 빼앗겼다. 신의 계시를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미국은 끝없이 밀려드는 이민을 수용할 새로운 영토가 필요했다. 오설리번이 민주국가가 아니라서 넓은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적시한 영국만 오리건의 절반과 캐나다를 보전했을 뿐이다. 명백한 운명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설리번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합병 대상으로 찍었던 쿠바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치른 끝에 필리핀을 얻었다. 필리핀을 지키려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약조를 두 차례나 맺었다.
‘명백한 운명’은 미국판 후발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이면서도 인종차별론의 선두 격이다. 토머스 칼라일의 ‘식민지 정복은 신의 섭리(1867년)’, 황인종의 발흥을 막아야 한다는 독일 황제의 ‘황화론(1895년)’, 서구인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는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백인의 책무(1899년)’ 등이 뒤따랐다. 백인은 정말 우월할까. 오늘날 미국은 옛 멕시코 영토인 국경을 막으려 군 예산까지 전용해 장벽을 구축 중이다. 말년에는 심령술에 빠져 유령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오설리번의 혼령이 트럼프 장벽을 본다면 뭐라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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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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