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학교로 돌아오는 도로 밖 풍경, 무성한 숲을 보며 친구와 대화를 했다.
푸른 웃음이 가득한 가로수 위에 이상한 실 뭉치들이 보였다. 누에고치였다. 어떤 뭉치는 핼로윈의 거미줄 마냥 머리를 풀어 헤쳤다. 또 어떤 뭉치는 놀이공원의 솜사탕 같았다.
누에가 부지런히 집을 지었구나 싶어 찬찬히 살펴보니 고치가 점령한 나뭇가지는 바짝 말랐다. 또 어떤 나무들은 선 채로 죽어 있었다.
“누에고치가 나무를 죽이는 걸까? 혹은 죽은 나무에 누에가 집을 짓는 걸까?” 친구에게 물어보니 친구는 아마도 누에가 집을 짓는 와중에 잎도 먹고 광합성도 막아, 나무가 서서히 굶어 죽지 않았겠느냐고 답했다.
때 마침, 소나기가 쏟아졌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에 차가 수상 스키 타듯 촤아-물길을 가르며 이동할 때, 친구가 흘긋 창밖을 보고 한마디 했다. “비가 와도 누에고치가 그대로인 거 보면 참 튼튼하네.” 그러게 말이다. 폭우와 태양 볕에도 누에고치는 둥치를 튼 채 버티고 있었다.
문득, 나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겠다 싶었다. 나무는 해와 달을 보고 비와 바람을 맞을 권리가 있다. 광합성으로 생명을 꽃 피울 힘과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놈의 누에가 자리를 잡더니 하루, 이틀, 수많은 날들의 결과로 고치를 틀자 나무의 푸른 웃음은 사라지고 어느덧 껍데기만 남은 미라가 되었다.
흰 머리를 흐트러뜨린 까맣게 고사한 나무를 보며 친구에게 또 질문을 던졌다.
“혹시, 우리 삶에도 누에고치가 있나?” 무슨 소리냐고 친구가 되물었다.
“자연은 진공 상태가 아니잖아. 혹시 내 삶에도, 내 지식과 마음 그리고 관계의 영역에도, 혹은 사회의 영역에서도 누에가 있을 거 같아. 내 생명을 야금야금 먹으며 고치를 틀고 있을 수 있겠지? 아니, 어쩌면 이미 누에고치가 된 영역이 있을지도 몰라.” 친구는 흥미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가 모르는 안팎의 암담한 현실과 은밀한 죄악들…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 그리고 마음의 독소 같은 무기력과 우울감… 그게 생명의 누에고치가 아닐까?”
누에는 내 속에 있을 수 있다. 마땅히 숨을 쉬고 희망을 노래할 삶의 영역에, 두려움의 실 뭉치를 마음에 둘러 나의 시선이 해와 달을 향하지 못하도록 바람과 새의 속삭임에 귀먹게 하는 누에고치를 만들 수 있다. 내 마음과 생각에 침입한 “두렵고 불가능해”라는 견고한 고치로 틀어 몸은 살았으나 생명의 감각은 죽은, 좀비같이 나를 마비시킬 수 있다.
혹은, 누에는 사회와 언론 안에 그 고치를 견고하게 틀어, 현실에 대한 암담한 지식의 실뭉치로 그 자취를 감추고 또한 우리의 시선을 돌릴 수 있다. 나무가 광합성을 위한 일조권을 주장할 때, 그건 가로수 관리 정책과 도로 환경 탓이라고, 제도와 구조로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다. 청년세대의 꿈과 희망을, 빛과 생명에 대한 권리장전을 좌와 우의 정치적 프레임에 가두는 386 세대를 볼 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누에고치 속에서 현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무에게 일조권은 생명권이다. 그런데 누에고치는 나무의 일조권을 독차지 했으니, 나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누에는 생명의 불법침입자이다.
친구와 대화를 하며 얽히고설킨 생각의 타래를 한줄기 빛으로 풀어내니, 마음의 곰팡이도 털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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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희 펜실베니아 주립대 성인교육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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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신문이나 TV에서 쏫아내는 모든 스토리보다 더 넓고 더 복잡하지만 그 나름 규칙인 자연의 법칙이 있어 모두가 어우러져 잘 돌아 간답니다, 내가 하는생각 말 행동 모두가 나를 만들고 있지요, 긍정으로 보면 그렇게 되겠고 악처를 만난 어떤 사람은 철학자가 되고 악조건에선 종교가 탄생하고 하지만 부정적인 마음은 자길 죽이고 이웃을 나아가나라 지구촌까지 좀먹게 만든다는걸 안다면 어 떤 걸 택할까는 각개 인의 결정이되겠지요. 우주는 자연는 세상은 보는이의 눈 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돌아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