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7세 소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잔혹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 남긴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용기와 의지의 화신 유관순 이야기는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담대한 투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유관순의 가족은 개신교신자였던 할아버지와 숙부로 인해 일찍이 기독교 집안이 되었고, 아버지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사회개혁과 교육사업을 전개한 계몽 운동가였다. 1919년 3월1일 서울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유관순은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충남 천안)에 내려가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고 천안에서도 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4월1일 아우내 만세시위의 선두에 섰던 그는 체포되었고, 이 시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총칼에 맞아 숨졌으며, 오빠 유우석 또한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었다. 온가족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쳤을 만큼 애국애족정신이 뿌리 깊은 집안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보다 유관순에게 중요한 사건은 미국인 선교사 앨리스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이름 사애리시)와의 만남이었다. 캐나다 태생인 그는 1900년 한국에 왔고 한국서 만난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1905년 결혼, 함께 충남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남편이 장티푸스로 별세하자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2년 만에 남편이 묻혀있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천안과 논산을 거점으로 교회, 육아원, 학교 등 20여개 교육기관을 세우고 여성지도자들을 양성하며 선교와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1910년 무렵 앨리스 선교사는 주일학교에서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고 리더십이 뛰어난 8세의 유관순을 만났다. 그는 가정이 어려운 유관순을 양녀로 삼았고 공주로 데려와 같이 살면서 영명학교에서 2년간 가르친 후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시켰다. 앨리스 선교사와 함께 살던 시절에 신학문과 기독교서적, 잔다르크 전기를 접한 것이 유관순의 민족정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3년간 공부했으며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등과 1학년이었다.
앨리스 선교사는 일제가 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던 1939년, 68세까지 조선에서 사역했다. 은퇴 후엔 LA의 선교사 양로원에서 지내다 1972년 101세로 영면했으며 현재 패사디나의 납골묘원에 안치되어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앨리스 샤프 선교사 기념사업회’가 출범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유관순과 샤프 선교사 부부의 동상이 공주 영명고에서 1일 제막식을 갖고, ‘선교사 사애리시 전기’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또 LA에 있는 그의 유해를 한국으로 이장해 남편과 합장하여 선교유적지로 조성하는 일도 추진 중이다.
한편 3인의 동상은 재미동포 출신 조각가 심재현의 작품이다. 심재현씨는 1980~90년대 LA에서 시몬손 화랑과 LACA 갤러리를 운영하다가 영주 귀국, 조각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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