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佛 유학해 정규교육 받고 언론사 설립…활발한 저술·외교로 독립 대의 알려
▶ 나치의 프랑스 점령 뒤 일본 밀고로 체포돼…레지스탕스와 활동하기도
이승만과 서영해(오른쪽)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연합뉴스]
일제 강점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 대한독립의 당위를 알린 서영해(徐嶺海·1902∼1949 실종)의 활약상이 당시의 프랑스 기록들을 통해 현지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서영해는 100여 년 전 임시정부 파리특파위원으로 활동하며 프랑스에서 책을 여러 권 펴내고 언론에 활발히 기고를 하며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린 독립운동가다.
'미국에 이승만이 있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일찌감치 파리에 유학해 뛰어난 식견으로 프랑스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국민대 장석흥 교수는 최근 파리 7대(디드로대) 한국학과를 중심으로 한국과 프랑스의 학자들이 결성한 학회 '리베르타스' 발표에서 서영해의 삶과 철학을 재조명했다.
3·1절을 앞두고 장 교수의 미발표 논문 '1930∼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 서영해의 독립운동'을 바탕으로 서영해의 프랑스 활동상을 당시 언론기사와 사료로 되짚어 본다.
◇일제가 자유 박탈한 현실 "거대한 감옥"…외교의 중심 파리로
서영해는 한약방 아들로 태어나 반상 차별의 구시대적 인습이 잔존하던 시대상에 더해 일제 강점으로 최소한의 자유조차 박탈당한 조국의 현실을 답답해했다.
그는 1933년 프랑스 국제정세 평론지 '에스프리'(Esprit)에 기고한 '한국의 문제'에서 당시 현실이 '거대한 감옥'이었다고 회고했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상하이로 건너간 서영해는 본명 '희수'를 바다를 의미하는 영해(嶺海)로 바꾼 뒤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장건상 등의 권유로 프랑스 유학을 결행한다.
모두가 미국 유학을 선호하던 때 서영해가 프랑스를 택한 것은 전략적 판단이었다.
파리가 외교의 중심지였고 불어는 외교가의 공용어였지만 막상 한국독립운동계에서 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여기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황기환을 중심으로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가 결성되고 '구주의 우리사업', '자유한국' 등의 잡지를 발행하는 등의 활약상이 임시정부에 전해진 것도 서영해가 파리행을 택한 이유가 됐다.
서영해는 프랑스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의 소도시 보베에 정착, 20세인 나이를 속여 초등학교 2학년 과정에 들어갔다.
월반을 거듭한 그는 6년 반 만에 모든 과정을 마치는 등 뛰어난 학업성취를 보인 뒤 1927∼1928년쯤 파리 소르본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학비조달이 어려워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포도농장과 식당 등에서 일하며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이때 일은 묵은 신문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신문과 장서를 탐독하며 역사의식을 벼리고 프랑스어를 갈고 닦은 서영해는 프랑스 신문에 한국을 깎아내리는 기사가 나오자 반박문을 기고하면서 기자의 꿈을 갖게 됐고, 1928년 파리 언론학교에 입학했다.
◇탁월한 식견에 유창한 불어로 현지언론 주목받아…도산 석방운동도 주도
독립운동을 본격화한 계기는 1929년 파리에서 열린 반제국주의 세계대회였다. 이때 서영해는 대회에서 유창한 불어로 한국 문제를 의제의 중심으로 부각시키는 활약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서영해는 1929년 고려통신사라는 언론사를 직접 설립하고 자신의 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Autour d'une vie coreene)을 간행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소설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은 '레 주르날', '르뷔 이스토리크'(역사비평) 등 프랑스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고 1년만에 5쇄를 인쇄할 만큼 팔려나갔다.
'르 프티 주르날'이라는 잡지는 '파리는 망명의 수도'라는 제목으로 서영해를 심층 인터뷰했다.
기자는 "서영해는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가느다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수줍은 중학생 같은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말하기 시작하자 깜짝 놀랄 정도로 급변했다. 목소리는 활기를 띠고 얼굴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열정적인 웅변가의 모습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고통과 수난의 이야기를 열어나갔다"고 전했다.
이 기자는 서영해의 인생사를 소개하며 "한국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이라며 기사를 끝맺는다.
1930년 잡지 '비타협'(L'intransigeant)의 서영해를 인터뷰했다.
기자는 "24세의 한국인이 프랑스어로 쓴 이 책은 이제까지 프랑스 작가들이 쓴 것과 다른 면으로 극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심오한 뜻을 지녔다"면서 "8년 전 프랑스에 온 서영해가 이 책을 통해 프랑스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프랑스국민으로서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고 극찬했다.
당시 프랑스 언론들이 이처럼 극찬을 했지만 이 책은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도 않았을 뿐 더러, 실제로 이를 완독한 국내 학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도산 안창호가 상하이 조계지에서 체포되자 서영해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도산의 석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치외법권인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이 도산을 체포하러 오자 프랑스 당국은 체포 영장의 집행을 허용했다. 이때 서영해가 프랑스 언론에 배포한 호소문이 '유럽의 자유양심에 고함'이라는 글이다.
그는 한국인이 일본의 야만적 억압을 받고 있다면서 상하이 조계에서의 도산 체포는 프랑스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치적 망명가들에 대한 환대의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에 프랑스의 사회단체도 서영해와 안창호 돕기에 나선다.
프랑스인권연맹은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도산 체포사태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기소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자를 즉각 석방하고 손해배상을 할 것을 요구했다.
비록 도산의 체포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서영해의 활동은 프랑스의 여론을 환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치 손에 파리 넘어가자 지하활동…"프랑스인들에게 투쟁의 과감성 봤다"
파리와 제네바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서영해가 위기를 맞은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프랑스가 일본과 같은 침략자들인 나치 독일의 수중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서영해가 나중에 귀국해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밀고로 나치에 체포돼 6개월간 감금생활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 '스링하이'라는 중국인 기자로 행세하던 서영해는 나치의 체포령이 다시 떨어지자 지하로 잠적,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함께 약 3년여를 활동한다.
서영해는 1947년 신문 기고에서 "거기서 나는 문화가 높은 불란서인이 자유를 위해 어떤 희생도 불사하는 투쟁의 과감성을 봤다. 문화인들의 타협을 모르는 의연한 태도도 배웠다"고 회고했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레지스탕스 대원 '마르세 테닌'이 후에 나치에 체포돼 총살당한 것을 애석해 하기도 한다.
파리가 해방된 뒤 서영해는 임시정부와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맡았다. 임시정부는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서영해를 최초의 주불대표로 선임한다.
이후 1947년 5월 귀국한 서영해는 해방정국의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정치판과 거리를 둔 채 문화부문에 힘을 쏟다가 1949년 상하이에서 실종되고 만다.
이런 내용을 최근 한불 독립운동사학회 '리베르타스'에 발표한 뒤 논문으로 정리한 장석흥 교수는 "서영해는 한국 독립운동의 불모지와 같던 유럽에서 20여 년간 독립운동을 지켜낸 주역이지만 국내에서는 한 편의 논문도 발표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작가·기자·외교관으로서 고군분투하며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했던 서영해의 외침과 절규는 오로지 세계평화를 향한 의지에서 비롯됐다"면서 "그 자취는 한국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세계평화 차원에서도 기억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베르타스는 파리 7대 한국학과의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와 장 교수를 주축으로 작년 12월 결성된 학회로, 프랑스의 한국학자들과 한국의 근현대사학자들 함께 모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공부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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