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작년 2월쯤이다. 지난 한국 대선 주자들 중 한 명이 콜로라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방문과 관련해 지역의 한 한인단체가 학생회에 문의를 해왔다. 이 정치인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통역을 맡아줄 자원봉사자를 찾아줬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자원봉사이니만큼 통역자에게 아무런 금전적 보상도 약속할 수 없다고 했다. 유력 정치인을 수행하며 통역 일을 해보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 소중한 경험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다소 황당한 제안이었다. 나름대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유력 정치인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통역할 사람을 한인사회로부터 소개 받아 공짜로 쓰겠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대학원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나는 정중하게 이 제안을 거절했다. ‘좋은 기회’라느니 ‘경력에 도움이 된다’느니 하는 명목으로 젊은 세대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고 경험 없는 학생들이라고 해도 ‘자원봉사’라는 미명 아래 그들의 노동을 대가 없이 사용해도 되는 건 아니다. 통역과 같은 고급노동을 보수 없이 제공하라는 것은 자원봉사가 아니라 착취라는 생각이었다.
그 단체의 주장대로 통역 자원봉사가 어떤 학생의 경력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지적 노동을 대가 없이 제공하는 건 다른 청년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다. 통번역이 ‘공짜’라는 인식이 번지게 되면, 통번역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다른 청년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 공짜로 쓸 수 있는 인력이 있는데 누가 전문 번역가를 찾겠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해당 한인단체에 최소한 법정 최저임금 이상의 조건으로 구체적인 제안을 해주길 요청했다. 내 요청에 대한 답은 없었다.
대학 한인학생회에는 한국 기업들이나 한인 단체들이 이런 ‘자원봉사’ 제안을 해오는 경우가 가끔씩 있다. 이런 제안을 받을 때마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한국에서 겪었던 일들이 겹쳐 보인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대기업의 정규직으로 일했던 일 년 남짓을 제외한다면, 나의 20대는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억울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한 유명 신문사는 대학생 인턴기자들에게 한 달에 30만원을 지급했다. 대학원 시절에는 조교에게 지급되는 돈은 임금이 아니라 장학금이기 때문에 시간당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런저런 군소 출판사에서 일했던 경험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한국의 청년들 사이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괜히 유행하는 게 아니다.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미명 아래, 더 절박하고 더 취약한 상황에 있는 청년일수록 공짜노동이나 저임금 노동을 강요당한다. 이것이 헬조선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여전히 학생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내 상황은 30대가 된 지금도 취약하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 한국을 방문해 몇 차례 강연을 했다. 내가 겨우 박사과정을 수료한 대학원생이라는 이유로 강연료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마구 할인됐다. 대학의 교수였다면 더 많은 돈을 강연료로 받았을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떤 처우를 받게 될까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주변의 많은 박사과정 유학생들은 이미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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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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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5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100% 맞는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해야 된다는 말이 있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스펙'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유학생 같은데 미국에서 part time work 이라도 임금 받고 일 할수 있나요?
한국식 멘탈리티 갖고 미국서 살다간 낭패보는 경우가 많죠.
그 법을 따르면 되고 그 법을 어기면 많은 벌금을 물릴 수 있습니다.
원래 자원봉사/volunteer 란 말 자체가 보수 댓가 없이 내가 원해서 한다는 뜻이 아닌가요? Internship 에도 연방 노동법 따라 paid & non paid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