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잔의 초대/정수일 전 뉴욕한인경제인협회 회장
가발행상으로 시작 브로드웨이 한인 최초로 건물 매입
5대 경협회장재임시 브로드웨이 한국학교 설립토대 닦아
전쟁 피난시절 포로수용소 철조망 통해 풀빵 팔던 기억도
▲유일한 행복은 학교 갈 때
70년대 중반~90년대에 맨하탄 브로드웨이 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 한사람인 정수일 전 한인경제인협회 회장, 그가 지난 5월13일 2017 엘리스 아일랜드 상을 수상하면서 새삼 이민 1세들의 노고를 되돌아보게 했다.
“앨리스 아일랜드 시상식에 참여한 아이들이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는 뉴욕 땅에서 꿈을 이룬 것이다.
1978년 4월19일 브로드웨이 한인상인번영회(초대회장 김영철)가 창립되었고 정수일은 1982년부터 2년간 뉴욕한인경제인협회 5대 회장으로 괄목한 만한 업적을 쌓았다.
먼저 브로드웨이 한국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시험단계로 그의 소유인 코리아나 빌딩 3층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한국학교를 개설했다. 현재 맨하탄한국학교이다. 또 브로드웨이 내셔널 뱅크(BNB) 설립을 위해 시장 조사와 노력을 시작했고 마침내 5년 후인 86년 9월16일 개점했다. 30여년간 잘 운영되다가 2015년 한국계 하나은행에 합병되었다. 그 외 골프대회와 연말 경제인의 밤 모임 등을 통해 회원 간의 친목에도 힘쓴 공이 크다.
정수일은 1941년 전남 화순에서 1남2녀의 독자로 태어났다. 홀어머니 밑에서 누나, 여동생과 함께 어렵게 성장했다.
“화순초등학교 시절 6.25가 나서 광주로 피난 가 방직공장 주변에서 살았다. 미군 지프차를 닦아주고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통해 포로들에게 풀빵을 팔았다. 빵을 주고 비누를 받는 물물교환식이었다.”
광주에서 4, 5학년을 보내고 2년 반만에 추석을 맞아 어머니가 고향에 다녀오자고 했다. 이때 소년 정수일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로 가서 창문 너머로 수업을 들었다. 매일 같이 찾아가자 6학년2반 박제오 담임선생이 그를 불렀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에 선생은 소년을 그 반에 들어와 공부를 하게 했다. 정수일은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했고 박제오 선생 은퇴식때 동창들을 불러 모아 은퇴 잔치를 열어드렸다.
힘든 가정형편 속에서도 학교 갈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정수일 소년은 6개월 후 1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상급학교 갈 돈이 없었다. 졸업식에서 서럽게 우는 그를 어머니는 업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소년은 1년 365일 집근처 산에 올라 나무를 잘라 장에 가 팔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1년 후 화순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학년 1학기를 1등으로 마치자 화순 국회의원 장학생이 되어 그때부터는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복숭아 행상과 떡을 만들어 팔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가발 패들러가 시작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3년 전액장학생, 전남대 4년간 특차 장학생으로 입학한 정수일은 대학시절, 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났다. 대학생 선교에 나선 그는 대구로 파송되었고 외국 유학의 기회가 왔으나 한국에선 국방의 의무부터 해야 했다.
65년 전남대 졸업 후 67년 공군간부 후보생이 되었다. 1미터79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매사 모범군인인 그는 서울공군본부 의장대 장교가 되었다. 4년반 동안 공군에 복무하면서 70~72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를 받았다.
어린 시절 가난의 경험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싶었던 정수일은 1973년 12월13일 뉴욕으로 왔다. 이미 9개월 전 아내 이순희씨가 뉴욕 몬테피오레 하스피탈에 간호사로 취업해 있었다.
뉴욕에 온 이틀 후 아내와 맨하탄 구경을 나와 메이시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파트타임직 구인광고를 보았다. 그날 영어테스트를 통과한 그는 그 자리에서 양복을 벗고 일복으로 갈아입은 뒤 일을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전에 아내에게 200달러를 벌어줘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맡은 크리스마스 선물 패킹이 끝나기 전에는 쉬지도 않고 열심히 해 마침내 아내의 손에 200달러이상을 쥐어줬다. 시간당 4달러였다.
그 후 상수도 파이프 공장에서 2주 일한다음 디스카운트 스토어로 옮겨 부매니저로 일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것이 좋았기에 교수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 싶었다. 그러자면 생활비와 학비가 필요했고,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아내의 선배 남편이 가발행상을 할 패들러를 모집 중이었고 1974년 브루클린 핏킨 애비뉴 길모퉁이에서 가발 행상을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한인최초 건물 소유
“일을 시작한 2월5일 날씨가 얼마나 추운 지 하루동안 5달러짜리 5개를 겨우 팔았다. 하루 마진이 12.5달러, 내가 결단을 잘못 내렸나 했지만 길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군인 정신으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사를 했다. 하루 25달러에서 1,000달러이상으로 물건이 팔려나갔다.”
1년 반 행상을 한 뒤에는 풀턴 스트릿에서 가게를 열었다. 길 건너 패들러 자리도 사서 길 양쪽에서 가발을 파니 일을 마친 아내도 간호사 차림으로 달려와 장사를 도와주었다. 결혼 전 가난하지만 인생에 자신감이 있었던 청년 정수일이 공주에서 병원을 하는 장인에게 “백만장자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고 한 약속이 이뤄질 조짐이 보였다.
“가발은 사양길이었다. 77년까지 가발 장사를 한 후 홀세일을 해야겠다 결심하고 그해 4월 브로드웨이 30가와 31가 사이에 가게를 얻었다. ”
이민 4년만에 가방, 모자, 스카프, 신발 등의 잡화를 취급하는 회사 ‘코리아나 트레이딩’을 설립했고 건물을 사게 된 것은 필요에 의해서였다. 장사가 잘 되어 물건은 쌓이는데 랜드로드가 점포에서 지하실 내려가는 공간 볼트를 못쓰게 해 정식항의를 했다. 렌트를 연장해주지 않을 것 같아 29가 소재 2,500스퀘어 피트 4층짜리 건물을 매입하여 창고로 사용했다. 이것이 브로드웨이 한인 도매상으로 최초로 빌딩을 소유하게 된 연유다.
80년 코리아나 트레이딩이 그곳으로 이사 가면서 29가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친구들과 빌딩을 공동구입하고 샤핑센터, 포트리 건물 등을 파트너로 구입한 뒤 부동산 가격이 대거 올라가기 시작했다. 2005년 뉴저지 패세익에 웨어하우스도 구입했다.
그는 뉴욕한인회 이사장(1987~1988), 평통 수석부회장(2001~2003), 재향군인협회 등에서도 활동하며 대통령 표창, 상공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LA 올림픽 블러바드 경우 한인들이 작은 빌딩을 많이 소유했다. 뉴욕은 그에 비해 빌딩 규모가 커서 사기가 힘들었다. 결국 랜드로드 좋은 일만 시켰다.”
비싼 렌트로 인해 탈 브로드웨이 한인들이 늘어나 현재는 뉴욕과 뉴저지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하루하루가 중요”
10년 전 은퇴하여 뉴욕과 플로리다에서 각각 일 년의 반을 지내는 정수일은 새벽7시부터 저녁7시까지 미 동부, 남미지역 등에서 사람들이 개미처럼 몰려와 물건을 사고팔던 풍경이 그립다고 말한다.
정수일은 이민 초보자와 현재 자영업자에게 조언한다.
“너무 늦는 것은 없다, 절대 포기하지도 말라, 내가 돈을 쫒아가서는 안된다. 돈이 나를 쫒아오게 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이순희씨와 슬하에 변호사인 미셸,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데이빗, 교사인 폴 2남1녀를 두었고 손자 1, 손녀1을 두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는 “아내에게 평생 고마웠다.”고 말한다.
대학 선교회 활동 중 만난 아내와 결혼하면서 “살아가면서 실망시키는 남편은 되지 않겠다”는 약속, 기독교인으로 헌신하는 삶, 부모로 부끄럽지 않은 삶, 이 세 가지 모토를 정했고 모두 지켜냈다. 그는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하루가 모여서 내 인생이 이뤄진다.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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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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