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뉴욕한인축구협회 박우하 제22대 신임회장
어릴적 신동소리 들으며 자라…정치인 꿈꿔
나이 40세에 유학길 올랐지만 일 병행 힘들어 포기
5년후 뉴욕 정착위해 세무사 자격증 취득
50넘어 조기축구 입문…열정만큼은 누구보다 최고
치열한 세상. 부대끼며 살자면 바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성급하게 나서지도 않는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올바르고 확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결코 샴페인을 미리 터뜨리지 않는다. 매사에 99%가 아닌 100%를 모토로 삼고 있다. 올바른 인생은 ‘느림의 미학’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늦깎이 축구 동호인이다. 쉰 살이 넘어서 조기축구에 입문했다. 비록 늦긴 했지만 열정은 남 못지않았다. 그는 바로 뉴욕한인축구협회 제22대 박우하(59) 신임회장이다.
정치인을 꿈꾸던 신동
그는 1957년 경북 김천 대덕면에서 태어났다. 4남2녀 중 막내. 아버지는 공무원. 두메산골에 살았지만 형과 누나들은 명문 중, 고교에 진학했다. 한학을 공부한 아버지의 교육을 중시한 가정교육 덕분이다. 그도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 모든 교과서를 암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국어와 한문’ 등 어학과목에 재능이 뛰어났다. 운동신경도 좋았다. 운동회 때마다 달리기 1등은 그의 몫이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정치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리더십이 강했다. 당시는 분단장에서부터 전교회장까지 투표로 뽑던 시절. 반장, 전교 부회장 등 출마하는 선거마다 백전백승. 풀뿌리 민주주의인 선거가 몸에 익숙해지면서 ‘정치인’을 꿈꿨다. ‘대통령’도 되고 싶었다. 미국 링컨대통령 전기를 보며 자란 이유다. 친구들에게 불리던 별명도 ‘링컨’이었다.
그는 5학년 때 두메산골을 떠나 전통의 명문 대구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자신의 재능을 키워주려 했던 누나의 배려였다. 중, 고교는 대륜과 경북고를 나왔다. 학창시절 학도호국단에서 대대장, 연대장을 맡았다. 정치인의 꿈을 실현하고자 리더십으로 대장 역할을 하며 다니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는 서울의 명문대학 진학을 원하고 있었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도전을 했지만 인연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서울의 건국대학에서 ‘정치행정학’을 전공했다. ‘정치인의 꿈’을 버릴 수 없어서였다. 대학생활은 공부보다 학생운동에 더욱 열심이었다. 1980년 5.18 때는 재야세력과 시위를 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대학 때 별명이 월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으로 불릴 정도였다. 당시는 그런 활동이 정계진출의 발판(?)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정치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늦깎이 유학생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삼성생명’에 취직, 법인영업 담당으로 6년 정도 일했다. 회사에 취직한 것은 정치인 도전을 위한 경제적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1985년 결혼했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 아내는 부산출신이었고 장인이 선박회사를 운영했다. 그래서 결혼 후 후계수업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장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선박회사는 파산했다. 후계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래서 다시금 신설보험회사인 ‘국민생명’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5년 정도 근무하다 퇴직했다. 경제적 독립은커녕 직장인으로 변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인의 꿈을 접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는 199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나이 40이 다 된 늦깎이 유학생이었다. 언젠가는 미국의 명문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찾아왔다. 나이 들어서도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어학연수를 하며 청과, 델리 가게 등에서 일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대학진학은 쉽지 않았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메트 라이트’ 생명보험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생활하다보니 대학진학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공부를 포기한 뒤 직장생활보다는 개인 비즈니스를 위해 세무사의 길을 택했다. 한국에서 직장 다니며 배웠던 보험과 재정분야 경험과 전공을 기반으로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나선 것이다.
99%=0%와 마찬가지
그는 2000년 세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뉴욕정착을 위해 자신 있고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전공분야를 선택한 것이다. 그 후 16년 동안 퀸즈에서 고객들에게 종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세금보고 전문분야는 물론 보험, 융자, 학자금 알선 등 관련, 인접 분야까지 모든 서비스를 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고객들을 편안하게 대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있다. 전화나 상담을 직접 한다. 사무실도 ‘동네 사랑방’처럼 운영하고 있다. 고객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한발 앞선 서비스는 기본이다. 초창기 고객을 비롯해 한 번 방문한 고객들이 변함없이 찾아오는 이유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일 처리는 100%다. 99%는 0이나 마찬가지다. 직원들 역시 꼼꼼하고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 1% 때문에 전체를 망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그의 지침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이다.그는 고객들이 미국의 공공시스템에 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공공기관들은 순서, 절차, 기간 등이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고객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회원들의 화합과 통합을…’
그는 2010년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축구협회 송득종 회장이 ‘축구 함께하자’는 권유를 하며 축구장으로 인도한 것. 그 때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에어링크 축구단’에서 운동을 함께 했다. 부회장으로 축구협회 활동에 직접 참여한 것도 그 때다. 그 후 2년의 이사장을 연임하기도 했다. 부회장, 이사장 등의 경험을 토대로 올해부터는 제22대 회장을 맡게 됐다.
그는 2년의 임기동안 축구 인구 저변 확대에 더욱 힘을 쏟을 계획이다. 축구가 이민 1세들의 운동으로 끝날 수 있는 위기를 맞을 정도로 축구인구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축구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축구의 생활화’를 꾀하는 것. 그래서 ‘생활체육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자부심이라 여긴다. 봉황기 쟁탈 등 기존대회 개최와 유소년 축구 지원 등을 지속적으로 펼칠 예정인 그는 오는 6월 텍사스 전미체전에서의 우승도 노리고 있다.
그는 축구협회의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참여부족과 운동장 확보의 어려움을 꼽고 있다. 해결책으로는 축구장 사전허가 신청 시스템 등을 구축하는 등 축구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나서는 것이다.
축구인들 서로간의 페어플레이 정신이 중요하다는 그는 “특히 축구는 연령, 수준, 직업, 환경 등 다양한 선수들이 모여 함께하는 운동이라 어떤 상황도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축구협회 회장은 물론 각 동우회의 대표들은 ‘포용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축구협회의 임원들은 책임감과 봉사정신이 있어야 하고, 축구를 하는 동호인들은 축구 그 자체를 재미있고 즐길 것을 바라고 있다.
‘갈등 봉합’을 신임회장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그는 “축구 동호회 간의 불협화음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는데 적극 나서, 꼭 회원들의 화합과 통합을 이루어 낼 것 ”이라고 포부를 밝힌다.
‘회장=머슴이다’
그의 삶의 철학은 일이 끝나기 전에 웃지 않는 것이다. 일의 크기에 상관없이 일비일희하지 않고 신중하면서도 꾸준하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인 의협심을 중요시 여기고 비겁, 비굴하지 않게 사는 것 역시 그의 생활신조다. 적게 먹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 왕성한 활동을 자신의 건강비결로 소개하고 있는 그는 독서와 한국의 시국에 관한 에세이 쓰기를 취미로 삼고 있고 골프를 유일한 스포츠로 즐기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앞으로 남은 인생의 계획은 ‘지금처럼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아름답게 익어(늙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는 낙천적이고 느림의 철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위사람에게 강직한 성격에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히는 성격으로 인해 ‘주관적이고 까칠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올해부터 57년 닭띠 동우회의 회장도 맡고 있는 그는 고객과의 골프모임, 성당 모임, 축구인 모임, 학교 동문 모임 등 왕성한 활동을 한다. 왜냐하면, 한번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며, 도전하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는 그는 축구는 여러 사람이 하는 화합이며 축구협회 회장은 머슴이라고 말한다. 회장은 낮은 자리에서 험한 일을 찾아서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인터뷰를 끝내며 자신은 물론 모든 한인들이 이민생활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추구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때로는 역경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삶에 당당하게 맞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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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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