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송하는 시가 몇 편이나 되는가?”란 질문은 문학을 전공한 자칭 문학도인 내게도 대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문학을 사치로 여기게 만드는 일상사에 집중하고 때때로 치이다 보면 더더욱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문학적 소양’이라는 말은 그 문학을 10년 가까이 전공으로 한 나에게도 가끔 자조적인 농담의 소재가 되곤 한다. 우리는 그렇게 ‘일용할 양식과 무관하다’는 오명의 꼬리표가 붙은 이 단어와 최근 색다른 만남을 갖게 됐다. 바로 가수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관한 이야기다.
문학 가운데서도 순수문학, 그 중에서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기록에 남을 위대한 문인들에게 주어진다는 노벨문학상이 한 대중가수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건은 사건이랄 만하다. 천하의 톨스토이도 받지 못한 상이지 않은가.
물론 그의 가사가 다분히 시적이고, 또 인류의 가슴 아픈 역사와 함께 했으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전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에 반대하는 여론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과연 노벨상 위원회는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일까.
노벨 문학상은 “이상적 방향(Ideal direction)을 제시한 문학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을 쓴 작가를 선정 해달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간 다수의 철학자와 윈스턴 처칠 등과 같은 정치인 수상자들이 있었지만, 단순히 전문 직업 문학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의 필력과 문학성 그리고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의문을 갖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크게 달라 보인다.
수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시적’이라 인정받은 딜런의 가사가 단순히 노래를 위한 것이지, 문학 자체를 위한 ‘언어 기반’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의 애칭인 ‘음유시인’이라는 단어조차 중세의 음악가를 일컬을 뿐, ‘글’만을 목적으로 하는 시인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상 소식 후 그의 음반과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별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한 적 없는 자서전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뉴스는 ‘문학의 사망선고’란 극도의 좌절과 분노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수상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쉽게 서지 않는다. 양쪽 의견 모두 충분히 수긍되는 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치게 현학적인 표현과 해석의 벽으로 세상 그 어느 고층 탑보다도 높이 솟아있던 ‘문학’이라는 실체를 노래 한 곡 외우는 노력으로도 엿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는 사실에 우려보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건 사실이다.
물론 문학의 학문적 완성을 위한 수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주 깊지 않은 전공 공부로도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동시에 그 형식과 이론들이 얼마나 많은 문외한들을 양산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소수자들의 전유물이 대중화되는 사건에 충돌과 좌절, 혼란이 있음은 당연하다. 머지않아 전문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형식파괴가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며, 그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순수문학의 수호자와 같던 노벨문학상이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내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며 그를 인정함으로 이 어려운 변화는 시작됐다. 그 결과는 그의 노래처럼 ‘바람’만이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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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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