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6년 6월25일,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 프로복싱 첫 세계챔피언에 오른 김기수 선수가 경기를 마친 후 환호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힙> 50년 전 6월25일은 김기수(1939~1997)가 한국 최초로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에 오른 날이다.
1966년 이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도전자 김기수가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를 이겨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한국 프로복싱 역사상 첫 세계챔피언을 배출한 이 대회는 천신만고 끝에 성사됐다. 최대 걸림돌은 대전료였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액수가 너무 컸다.
이탈리아 출신인 벤베누티는 서울 원정 대전료로 당시론 엄청난 거금인 5만5,000달러를 요구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이 131달러였다.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은 20원이었다.
프로모터는 어렵사리 대회 날짜를 잡았지만, 엄청난 대전료를 어떻게 마련할지 막막했다. 그때 청와대에서 김기수를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기수 선수, 이길 자신 있어요?”라고 물었다. 김기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전료를 내주라고 지시했다. 김기수로서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경기였다.
장충체육관은 관중 6,500여 명이 가득 메웠다. 박 대통령까지 현장에서 지켜봤기에 사각의 링에 오른 김기수는 엄청난 부담을 가졌다. 그때까지 벤베누티가 65전승을 거둔 강자라는 사실도 신경 쓰였다. 김기수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그와 맞붙어 패한 경험도 있었다. 김기수가 절대 열세라고 대다수 전문가가 평가한 이유다.
1회전 공이 울리자 이런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초반부터 불꽃 튀는 접전이 전개됐다. 벤베누티의 빠른 공격을 위빙과 안면 커버로 막아내면서 강한 양 훅과 카운터펀치로 응수했다. 9회에 강펀치를 턱에 맞아 휘청거렸지만 10회에 반격에 들어가 벤베누티 콧등을 찢기도 했다. 그 이후 5라운드는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포인트를 착실히 쌓았다.
경기 종료 후 한국 심판은 김기수 승, 이탈리아 심판은 벤베누티 승으로 결정해 1대1이 됐다.
그리고 나머지 심판 한 명이 김기수 손을 들어주면서 역사적인 세계챔피언이 탄생했다.
관중들은 일제히 열광했고, 박 대통령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힘차게 손뼉을 쳤다.
신문들은 세계챔피언 등극 소식을 호외로 알렸다. 이틀 후에는 축하 카퍼레이드까지 했다. 라디오 중계로 시합에 귀를 쫑긋 세웠던 서울 시민은 김기수 얼굴을 보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7월 15일에는 현장 영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세계의 철권왕 김기수’가 전국 대형 극장에서 일제히 개봉했다. 세계챔피언 탄생은 어둡고 가난한 시절 전 국민의 가슴에 통쾌함을 안겨줬다. 모두 자신이 챔피언이 된 듯이 기뻐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함경남도 북청에서 월남한 김기수는 전쟁 탓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북한 남침 일인 6월 25일에 인생 항로를 화려하게 바꿨다.
전남 여수에 정착한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전남을 주름잡는 씨름 선수로 활약했다. 훗날 유명 레슬러가 된 김일에게 패하고서 일본으로 건너가 역도산 문하에서 레슬링을 배웠다. 그러나 역도산이 사망하자 레슬링 꿈을 접고 귀국해 복싱으로 전향했다.
광복 이후 첫 세계챔피언의 영광을 조국에 안긴 그는 2년 뒤 3차 방어전에서 챔피언 벨트를 잃어 통산 전적 37전 33승(18KO) 2무 2패를 남기고 글러브를 벗었다.
김기수 이후 한국은 1970~1980년대 프로복싱 강국으로 군림했다. 세계챔피언을 44명이나 배출했다. 그러나 2007년 7월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됐다. 챔피언 벨트를 반납한 지인진을 끝으로 챔피언 명맥이 끊겼다. 챔피언 부재는 복싱계 내부 싸움과 열악한 처우 탓이다.
김기수의 첫 세계챔피언 등극 50주년은 한국 복싱의 초라한 현실과 맞물려 더욱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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