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때문에 2주일가량 집을 비웠다 돌아오니 큰 애는 점잖게(?) 반가워했고 아직 꼬마인 둘째는 달려와 안겼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로 시작한 아이의 환대는 끝이 없었다. 누구랑 놀았는지, 뭘 먹었는지… 일단 눈을 좀 붙이고 싶었지만 아이의 수다를 듣는 게 즐거워 하품을 참았다.
“근데, 아빠는 형하고만 이야기 했어… 그래서 나는 슬펐어.”
자, 아이와의 대화에서 빨간 색으로 밑줄 쳐야 하는 부분이 나왔다. 요즘 부쩍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첫째는 저녁식사 시간 대부분을 아빠와 대화하고 자신의 관심 분야를 공유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둘째와의 대화는 내 차지가 되었는데 그 대화 상대가 부재 중인 관계로 부쩍 심심했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아이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엄마는 아니다. 구연동화 하듯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맛깔나게 대화하는 다른 엄마들을 보며 내 유전자에는 없는 성격을 부러워 한 적도 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한 게 아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씩씩거리며 “친구가 나한테 소리를 질렀어!”라고 하면 “친구가 소리를 질러서 우리 아들이 화가 많이 났구나…” 하는 식이다. 그냥 아이의 말을 듣고 그대로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것뿐인데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아이의 기분이 풀리는 경험을 자주 했다.
젊어서 나는 내 주장을 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 두서없이 이야기 하면 “그러니까 포인트가 뭐야?” 한다거나 “본론부터 이야기 하라”며 남의 말을 자르곤 했다.
사실 요즘에도 남편의 말을 듣다가 그런 건 이렇게 표현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하고, 시부모님이 손자들의 질문에 요지가 어긋난 대답을 하실 때도 옆에서 “어머님, 얘 말뜻은요…” 하면서 바로 잡아드리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엄마가 되어보니 해결 방법을 주지 못해도 그저 조용히 들어만 주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것을 느낀다. 나 역시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분들 덕분에 무사히 그 시기를 견딘 적이 많다.
친구 중에 한명은 내가 새로 맡은 일에 대해 주절주절 걱정을 늘어놓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걱정 마. 넌 잘하고 있어”라며 위로를 해준다. 이쪽 분야를 전혀 모르는 그 친구가 해주는 근거 없는 위로는, 그런데 생각보다 내게 많은 위안이 되곤 한다. 상대가 그저 같이 한숨 쉬어주고, 혀를 차는 추임새만 해줘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지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나의 황당한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이래저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할 때도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느냐” 지적하지 않고, 나의 실수나 잘못을 고백했을 때도 “왜 그랬어?” 나무라는 대신에 “그럴 수 있어”라고 다독거려 줄 수 있는 친구는 평생의 자산이다.
항상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없고,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없다면, 그저 아무 편견 없이 잠시 내 귀를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 않을까. 정답을 제시하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잠시 혀를 깨물면 분명 누군가에게는 큰 응원군 역할을 할 수 있다.
안 그래도 요즘 아이들이 하는 말을 한번에 못 알아듣기 일쑤였는데, 늙어서 청력이 나빠지는 게 절대 슬픈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더 훌륭한 경청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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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조/ 마케팅 교수·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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