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차한잔의 초대/ 아동·청소년 및 가정상담가 안영희(권영희) 박사
28년간 뉴욕시 교육국에서 문제아동 정신 상담을 비롯, 한인을 비롯 아시안의 정신건강 상담을 40여년간 해오고 있는 안영희 박사. 미국생활 53년을 맞은 그의 삶을 돌아본다.
▲ “속이 시원하다”
아동·청소년 및 가정상담가 안영희 박사의 일주일은 정신없이 지나간다.
화요일 하루는 어느 교회에 자원봉사를 나가 ‘문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오라’며 문을 활짝 열고 있고 수,목,금요일은 KCS(뉴욕한인봉사센터) 정신건강 클리닉에서 일한다. 이곳에서는 13세이상부터 노인들까지 한국말로 상담하고 있다. 롱아일랜드 글렌헤드 지역에서는 홈 오피스를 열어 개인 상담을 하고 있다. 환자들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정신상담가는 만나기 힘들고 상담료도 비싸다. 그러나 그에게 가면 저렴한 상담료는 물론 돈이 없어도, 보험이 없어도 걱정 말라고 한다.
“한인들은 말을 안하고 참다가 우울증이 깊어진다. 우울증은 초기에 와야 한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들면 우리의 감정, 슬픔, 분노는 결코 안 없어진다. 이것이 머리로 올라가서 머리가 깨지게 아프고 한인들이 잘 걸리는 위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믿을만한 사람과 토킹 치료를 해서 고통을 해소시켜야만 한다.”그동안 모든 타인종과 상담을 해왔지만 현재 환자 80%가 한인이다. 40여년간 수많은 상담을 해왔지만 내용은 절대 비밀이다. 하지만 워낙 오래되다보니 딸들은 엄마가 요즘 자기들과 상담 중인 것을 눈만 보면 안다고 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혜화유치원, 경기여중, 경기여고, 이화여대 영문과 등 최고명문 코스를 거친 안영희(권영희)는 영문과 원어연극인 손튼 와일더 원작 ‘우리 읍내’( Our Town)에서 남자주인공인 장모역을 하게 된다. 이 연극을 본 후배의 소개로 연세대 선교사이자 교환교수를 만난 것이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되었다.
“젊은 여자 교수의 한국말 통역과 번역을 도와주면서 교수를 따라 안가는데 없이 따라다니다 사회복지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원래 책을 좋아해서 작가가 되고자 했던 안영희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버클리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의 합격통지서를 받았으나 아버지 권중돈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할아버지는 경북 영천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갑부지만 상위에 깍두기와 김치 두 가지가 오르면 한 가지를 내리게 헸고 신령에서 갑티까지 5전인 버스를 타지 않고 달구지를 타고 다니실 정도로 근검절약하는 가풍을 물려주셨다. 아버지는 1960년대 국방부장관 출신으로 신민당 국회의원을 여러 번 지내면서 청렴한 선량으로 소문났었다. 유학은 반대했으나 딸이 뉴욕대학원에 재학 중인 안창규씨와 결혼 한다고 하자 승낙이 떨어져 1962년 미국에 올 수 있었다. 그는 1남 3녀를 낳아 키우면서도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여자나이 40이 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주위의 말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고 39세에 포트 워싱턴 집에서 20분 거리인 롱아일랜드 아델파이 대학원에 들어갔다.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이
이 학교는 그의 나이 22세, 교환교수이자 선교사 나이 26세때, 둘은 함께 ’모닝스타‘( Morning Star)’ 란 영화를 보러간 일이 있었다. 배우 나탈리 우드가 아델파이 대학을 졸업하는 장면이 나오자 함께 간 선교사가 펄쩍 뛰고 좋아하면서 ”내가 졸업한 학교“라고 해서 그 학교 이름을 기억한 것이다.
그이후 17년만에 안영희는 아델파이 대학원을 다녔다. 막내가 킨더가든을 다니고 위의 세 아이는 다 커서 별로 손 갈 것이 없었다. 친정어머니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림을 많이 도와주시다가 101세에 돌아가셨다.
또한 안창규·안영희 부부는 1977년 포트 워싱턴 지역의 고등학교를 빌려 롱아일랜드 한국학교를 설립, 2세들의 한국어 교육에 힘썼다. 당시 신경엑스레이 전문의 김승억·천취자 부부가 롱아일랜드 지역 최초의 한국학교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77년 아델파이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상담학을 전공한 후 가든 시티 부촌과의 경계선에 있는 구세군 커뮤니티 센터 디렉트로 3년간 일하는데 저소득층 주민들의 요구가 끝이 없었다. 이때 미국회사를 다니다가 무역사업에 종사한 남편이 “공부를 더 하라, 이왕이면 컬럼비아 대학원에 가서 크게 배우라.”고 격려한 것이 컬럼비아 대학원을 가게 되었다.
“60명 지원자 중 25명이 뽑혀 박사 코스를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롱아일랜드에서 맨하탄 컬럼비아까지 운전하고 가면 주차할 데가 없었다. 수없이 기도했다. 이게 허영입니까,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겁니까, 수업 들어가기 전에도 기도했다. 어느 날 영어로 음성이 들려왔다. 너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로 주겠다는...”하지만 너무 힘들다보니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고2인 둘째딸의 주일학교 선생이 자신은 댄스를 좋아하다보니 가정에 소홀했다. 가정이 더 중요하니 너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공부를 그만 두라고 말렸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인 네가 예수님 안에서 선한 사업을 하기위해 미리 예정된 것이다 하는 말씀에 용기를 얻었고 더 이상은 아무리 어려워도 겁이 안났다.”안영희는 ‘삶의 고비마다 간증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46세에 박사 코스에 들어가서 6년만인 52세에 처음 6명 중 한사람으로 컬럼비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을 실체화 하게 한 남편 안창규 장로의 물심양면 뒷받침이 컸다”고 덧붙인다.
▲남을 도와주면 행복해
안영희는 87년 컬럼비아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의 상담학 전공 디그리를 받은 후 아델파이 대학 심리학과 소속인 아동·청소년 및 가정 정신분석을 위한 포스트닥터 프로그램을 3년간 수료한다. 1992~2000년 뉴욕 헌터칼리지 사회복지학과의 상담학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원생에게 인간성장과 발달에 대해 가르쳤고 1998~2002년 정신분석학원에서 정신요법 전문상담원 훈련을 시켰다. 2003년에는 알바니 세인트 로즈 칼리지에서 교장과 행정책임자 자격증을 받았다.
1986~2014년 6월30일까지 장장 28년간 그가 일한 곳은 뉴욕시 교육국이다. 특수과에서 일하며 정상적인 공부가 어려운 문제아동을 정신상담했다. 1988~1997년 뉴욕시 교육 아시안아메리칸카운슬 멤버, 1995~1998년 뉴욕시 정신건강과 정신트레이닝 프로그램 멤버이자 고문을 거쳐 91년부터 현재는 아델파이소사이어티 정신분석학과 정신요법회원, 1980년부터 사회사업 내셔널학회 멤버이다.
저서로 ‘코리안 아메리칸의 알콜중독(2000년), 3인 공저로 ‘도미니칸과 코리안 패밀리들’ 등이 있다.
“한인사회 젊은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유년기는 인생 발달의 가장 중요한 시기다. 부모와 교사들이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주고 어릴 적부터 교회에 데리고 나가 신앙심을 심어주는 것이 좋다.”“상담을 하여 상대방이 좋아졌을 때, 남을 도와줌으로써 행복한 느낌을 갖는다. 하나님이 주신 직업이고, 선한 일을 기쁘게 하고 싶다. 상담도 계속 하고 싶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일할 것이다.”작년에 남편을 사별하고 의사, 영양학사, 변호사, 투자회사 부사장 등으로 훌륭하게 성장한 4남매에 7명의 손주를 둔 안영희, 그의 바른생활 삶은, ‘사회봉사’라는 한 길을 오랜 세월 변함없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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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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