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다. 불타는 듯한 단풍의 색깔이 눈이 부시도록 곱다. 한여름 깊은 무게의 생명력을 자랑하던 초록 잎들이 불타는 색으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모든 것들은 자라고 성숙하고 쇠퇴하고 저물어가는 과정의 연장선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이 변화 속에 지나가는 시간을 명상하고 삶의 의미를 사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세월이 빠른 것을 나이가 들면서 갑자기 깨닫는 시점이 있다. 세 아이들이 커서 하나하나 대학에 갔을 때 텅 빈 방 앞을 매일 지나며 느끼던 허전함은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막내를 대학에 보내며 짐을 싸던 날은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으로 세상이 다 자욱한 안개 속에 가라앉아버린 것 같았다.
집에서 아이들과 같이 십사오년을 자라던 두 마리의 개도 나이 먹고 병들어 일 년을 사이에 두고 안락사를 시켰다. 뒤뜰에 무덤을 만들고 돌 비석를 세울 때의 슬픔 또한 세월의 깊이만큼 한으로 남아버렸고, 그 엉긴 가슴을 안고 산지가 10년이다. 낙엽이 돌비석 위에 지고, 떨어진 잎이 쌓여서 아름다운 풍경화를 다시 그리고 있다. 또 한 해가 가고 있다는 표시일 것 이다.
계절의 변화는 우리 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옛 사람들도 계절의 변화와 빠르게 가는 시간에 대한 탄식을 시로 적은 것이 적지 않다. 남송의 대학자 주희가 남긴 “나이 먹기는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려우니, 한 순간의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연못의 봄풀들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계단 앞에 떨어지는 오동 잎사귀는 벌써 가을을 알리는 구나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라는 권학시 (勸學詩)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점은 시간을 아껴 열심히 학문에 힘쓰라는 것이지만, 이 시속에 드러나는 노학자의 세월에 대한 비감은 실로 남다른 것이다. 할 일은 많은데 세월은 참 빨리도 가는구나, 마음은 아직도 소년인데 몸은 벌써 노인이 되었다는 긴 탄식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시이다.
가는 시간과 세월을 되돌리려는 헛된 노력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이 보아왔다. 진시황과 불로초에 대한 전설 같은 역사의 기록도 결국은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자연의 변화를 되돌려보려는 무모한 시도였고, 수메르(Sumer) 문명이 낳은 인류의 첫 대 서사시 길가메쉬 (Gilgamesh)도 역시 같은 불사초에 대한 인류의 희망을 그려낸 것이었다.
모두 실패로 끝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회춘(回春)하겠다는 인간의 욕망은 어리석은 것이요 허망한 것이라는 교훈일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봄이 오고 무성한 여름이, 그리고 또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이치가 있고, 이를 거스를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만 이런 변화 속에서도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부지런히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사도 바울의 당찬 선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적인 세계를 향해서 바로 서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나 스산한 인생의 가을바람과 상관없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겉 사람이 늙지 않고 젊어지는 소설이 있다. 핏제럴드 (F. Scott Fitzgerald)가 쓴 벤자민 버튼(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태어날 때 아주 늙은 아기로 태어나서, 시간이 가고 나이가 먹을수록 젊어진다는 내용인데, 2008년에 영화화 되어 성공한 작품이기도 하다. 계절이 변하고 시간이 갈수록 젊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정말로 그 것이 좋은 것일까?
주인공 벤자민은 점점 젊어져서 84세가 되는 해에 어린 아기가 되어, 이제는 늙어 할머니가 되어버린 연인 데이지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데…… 사망의 원인이 치매였다는 이야기다. 사도 바울의 선언과 반대로 겉 사람은 새로워졌으나, 속사람이 낡아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핏제랄드의 생각도 우리 인생에 가을이 오고 단풍이 지고 겨울이 온다고 해도, 자연스런 시간 속에 성숙해가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이리라.
바람에 지는 단풍잎처럼 버릴 것은 버리고 지울 것은 다 지워서 마침내 아름다워지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다시 돌아온 이 가을에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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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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