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앤의 영롱한 눈이 병원 불빛에 흔들리고 있다. 엄마와 혈액검사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갓난아기 때 수혈을 받다가 C형 간염에 전염돼 지난 이십수년 동안 간헐적인 증세에 시달려왔다. 그러다가 새내기 간호사로 밤 근무를 시작하면서 과로 탓인지 간수치가 눈에 띄게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였던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았다. 앤의 아비인 남동생 네와 함께 보면서 변두리 도시의 주차단속원 심은하가 꼭 우리 앤같이 착하고 씩씩하다라고 했었다. 정작 영화에서는 노총각 한석규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은하를 만나는 순간부터 그에겐 하얀 여름비가 크리스마스 눈송이처럼 내렸었다.
앤의 아비인 내 동생, 건이가 오십 초반에 세상을 뜬지 3년이 되었다. 그도 군대에서 얻은 B형 간염으로 투병하다가 암으로 갔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중학생 때 미국 유학 가는 나를 마중하며 큰 눈에 흥건히 고였던 눈물을 잊지 못한다. “형, 우리들 생각나면 틀어봐.” 그는 제가 손수 녹음한 가족들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건네주며 울먹였다.
내가 미국 사는 동안 그는 형 없는 아이처럼 자랐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기울어진 가세를 어머니와 두 자매를 이끌고 장남노릇을 하며 지탱했다. 억새처럼 세파에 꺾이지 않고 견뎌냈다. 배우 송승헌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6척 장신 미남형에 성실한 그는 군대서나 학교에서나 주위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내가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한 후, 건이는 천생연분 아내와 예쁜 두 딸을 낳아 길렀다. LA로 터전을 옮겨 국제 항공선박 회사에서 일하면서 승진을 거듭 경영책임자로 일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일한 탓인지 그 건장하던 몸에 병이 도졌다. 그때 아빠의 병을 고치겠다고 간호대를 지망했던 앤은 아빠가 세상 뜨는 순간까지 수족처럼 간병했었다.
이제는 조카 앤의 C형 간염 치료가 온 가족의 염원이 되었다. 아비도 간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딸까지 간질환으로 잃을 수는 없노라고 할머니와 이모들은 눈물로 기도한다. 앤도 20대 초까진 기초면역으로 벼텼는 데 격무에 시달리면서 간수치가 급히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즈음, 길리엇이란 신생회사에서 만든 새 C형 간염 치료제가 FDA승인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B형 간염은 예방백신은 있어도 치료약은 없다. 대신 C형 간염은 백신은 없어도 치료제가 개발된 것이다. 그러나 기존 약들은 부작용이 많고 치료효과도 낮았다.
그런데 길리엇의 신약은 오랜 임상실험 결과 완치율이 90%이상 되는 기적의 치료제로 알려졌다. 희망을 걸고 약을 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약값이 웬만한 집 한 채 값만큼 비쌌다.
법대생인 앤의 언니, 르네가 보험회사에 간곡한 편지를 써보냈다. 사정을 설명하며 보험에서 부담해달라는 청원서였다. 그러나 세번째 청원에도 그들은 비싼 신약 값을 부담하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결국 은행 빚을 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앤의 간수치는 자꾸 증가하고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르네는 마지막으로 제약회사 길리엇에 직접 청원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투약에 성공하면 회사 명성과 함께 유망한 젊은이의 생명을 살리는 선행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놀랍게도 불과 2주 만에 길리엇에서 승인편지가 왔다. 앤의 환자기록을 검토하고 신속히 내린 결론이었다. 바로 투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매 4주마다 혈액검사도 병행되었다.
오후 늦게야 병원실험실 로비에서 기다리는 앤에게 수간호사가 검사용지를 손수 들고 나왔다. 같은 병원 동료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앤, 바이러스 제로, 간수치 정상이야. 이건 지난 세번에 걸친 동일한 검사 결과야. 축하해요”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후, 르네도 변호사시험 합격통지를 받았다. 르네와 앤의 아비, 건이가 두 딸에게 하늘에서 보내준 눈송이 같은 축복의 선물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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