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니아’ 숲속으로 가자. 여름이면 단 한번이라도 ‘라비니아 페스티발’을 즐겨야만 한 여름을 산 것 같다. 시카고에 살면서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 지어진 불문율이다.
라비니아 페스티벌은 일리노이 북부 하일랜드팍 숲속에서 6월부터 9월까지 열리는 야외음악 잔치다. 라비니아팍은 1936년 이래 시카고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여름 공연장이다. ‘파비리온(연주장의 이름)’의 좌석에 앉아서 감상하기도 하지만 잔디에 앉아서 피크닉을 즐기면서 공연을 듣는 맛이 일품이다. 시카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여름밤에 향수를 느낀다.
잔디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연주를 듣는 맛은 환상이다. 앙증스러운 상 위에 작은 촛불을 켜놓고 음식을 즐기면서 여름을 위하여 축배 한다. 노부부가 마른 손을 꼭 잡고 와서 음악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면 추억을 불러다 놓고 담화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연인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포도주를 마시면서 눈 맞춤을 하고 있는 것도 보기 좋다. 여러 악기들이 내뿜는 특유한 음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여름밤의 멋은 더해간다.
한 순간 생활을 벗어놓고 자유를 입은 우리 일행들, 시간에 바퀴가 달린 것을 몰랐다며 풀밭에 누워서 별을 헨다. 하늘의 달과 별, 조명, 촛불, 모두가 꿈같다. 그래서 ‘ravinia music fastival’ 을 ‘music under the stars”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둠을 입고 반짝거리는 나뭇잎을 응시하며 오케스트라 화음에 취하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캄캄한 어둠속에도 검은 눈부심이 있다. 글자 없는 동화책은 이야기가 없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이야기가 쓰인다. 숲속에 감도는 선율 또한 속에 조용히 감추어져있다가 따끈따끈한 사연으로 변신하여 우리의 가슴에 수없는 얘기를 남긴다. 우리 마음에 숨어있는 경험기억을 활성화한다.
지나간 그 시절 우리가족 이 자리에 누워서 파바로티를 들었었지. 다스운 김이 모락거리는 아름다운 가족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 어린것들이 자라서 지금은 각기 포근한 자기 둥지를 틀고 나의 기둥이 되고 있다.
그 어느 해던가 우리 벗님네들 랍스터를 사가지고 와서 온 손에 바다냄새를 뒤범벅하며 뜨거운 기름에 달군 빵까지 삼키면서 숨죽여 킬킬거리며 신이 났었지. 그리고 그 밤 10대의 소녀들처럼 파자마 파티를 했었어. 날이 새도록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속이 후련했고 모두 벙긋벙긋 웃기만 했었던 추억들. 가버린 날의 작은 이야기 토막도 나의 삶에는 소중하다. 마치 장중하고 장구한 역사처럼 말이다.
음악은 배를 부르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현묘한 지혜를 가졌다. 곤고하면서도 끈질긴 삶을 도닥여준다. 인간의 심적 갈등 속에 존재하는 빛나는 슬픔, 애잔한 슬픔을 격조 높은 통제로 다스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음악인 듯싶다.
음악을 감상하고 났을 때의 가슴 충만함, 유려함으로 오는 후감, 여기에 예술을 아끼고 즐길 줄 아는 인간의 우월성이 있는 것 같다.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은 베토벤이 공원을 산책하다가 들은 새소리를 소재로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음의 조화가 주는 감흥으로 우리는 그토록 감격할 수 있는 족속이다.
꼭 그렇게 유명한 곡이 아니어도 좋다. 풀밭에 누워서 어떤 연주를 듣던 상관이 없다. 그저 라비니아의 밤은 멋이 있다. 평범한 우리가 여왕이 된 것 같아서 좋고 일상의 갈증을 거뜬하게 해소시켜주어서 더욱 좋다. 라비니아의 심포니 오케스트라여, 더욱 우렁 차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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