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도미를 준비하던 내게 미국은 어떤 이들의 표현처럼 ‘구세주의 나라’까지는 아니었어도 모든 사람이 자유와 풍요를 구가하는 ‘선진국’이었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로렌스’라는 거리를 지나게 되었는데, 심지어 이 거리명조차도 나를 감탄시켰다.
“아, 차탈레이 부인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D.H. 로렌스의 이름을 딴 거리라니…” 그런데 그 로렌스 거리에는 라틴계로 보이는 사람들(그 때는 히스패닉이라는 단어도 몰랐다)과 중동계로 보이는 사람들만 보일 뿐 ‘진짜 미국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진짜 미국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 것일까?”지금 와서 생각하면 “미국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쓴 웃음이 나오는 에피소드지만, 그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선진국’ 환상은 줄줄이 깨어져 나갔다. 한국에서도 이미 실시되고 있던 국가 의료보험이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직장여성의 유급 출산휴가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거의 경악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실망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살다보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미국 사회를 움직여가는 건강한 가치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하나가 개인적인 인격과 그 사람의 공적인 업무를 구분하는 분별력이었다. 서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격렬하게 토론하다가도 토론이 끝나면 개인적인 감정없이 깨끗하게 마무리 짓는다거나, 업무상 실수에 대해 책임 추궁은 철저히 하되 인격적 모독은 가하지 않으려는 매너와 말투가 감탄스러웠다.
이에 반해 한국 사람들은 누군가 업무상의 실수를 저지르면, 그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앞서나가느라 오히려 정작 필요한 원인 분석이나 책임 규명에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나는 미국인들의 이러한 이성적 태도와 분별력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사례가 조승희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07년, 버지니아 공대 4학년이던 한국계 학생 조승희가 캠퍼스에서 총기를 난사해 32명의 꽃다운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다.
이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으며, 미국인들의 분노가 한국과 한국인으로 향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이민자들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미국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한 개인의 범죄 행위를 집단으로까지 확대시켜 해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피습사건에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미국 외교관을 공격한 사건을 두고 ‘한 개인의 돌출 행위’로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 한국사회에는 마치 그 때처럼 집단적 죄의식과 불안감이 번져들었고 ‘석고대죄’라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까지 발생했다.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표출되는 한국사회의 집단적 쏠림현상이 내게는 상당히 우려스럽고 불안해 보인다. 오늘 아침에 읽은 한국의 한 사회면 기사는 주먹을 휘둘러 사촌형을 의식 불명에 빠트린 이가 중국 동포 출신임을 친절히(?) 알려 주었다. 내로라하는 언론조차도 사회적 소수자의 스테레오 타입화를 거리낌 없이 부추기는 것이다.
내키기 않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 동포 가운데 한 사람이 조승희와 비슷한 사건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사태들이 곳곳에서 빚어졌을 것이다.
집단적 죄책감은 집단적 공격성과 일맥상통한다. 부채춤을 추고 석고대죄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집단적 증오와 공격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본다.
개인의 잘못을 그가 속한 집단으로까지 확대시키지 않는 것, 나아가 개인의 잘못을 단죄할 때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사생활은 보호해 주는 것, 이것이 진짜 선진국, 성숙한 시민 사회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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