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최근 알게 된 한 친구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내가 어때 보였는데?”라고 되묻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평소 스스로 인지하기 어려운 서로의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레 시작하게 된다.
이런 대화는 물론 쌍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반복될수록 처음 얼굴을 마주하고 첫 대화를 나누던 때보다 더 다양한 수식어로 서로를 정의할 수 있게 된다.
후엔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보게 되는 계기로 발전되어 같은 행동을 해도 ‘의식’이라는 불편함을 통과하게 되기도 한다. 즉 외부로 표출되고 타인에 의해 평가되는 ‘공적인 자아’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는 의미다.
무의식적으로 행하던 일들에 의문을 갖거나 의미를 찾는 건 사실 피곤한 일이다. ‘의식의 흐름’을 주창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크게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행하는 많은 습관들로 인해 우리는 얼마간의 정신적 억압에서 벗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공적인 자아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때때로 사적인 자아를 노골적으로 과장하거나 반대로 철저히 숨기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인식의 과정이 전무하다는 핑계로 비논리적으로 행하던 많은 일들을 그치게 된다는 선기능이 있는 반면 딱 그만큼의 심신의 안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듯 보인다. SNS 등, 담담한 술회보다는 즉각적으로 표출되고 자극적으로 꽂히는 가벼운 제스처에 더 쉽게 동요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영국의 정신분석의 앤소니 스토(Anthony Storr)는 이토록 힘든 족쇄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현대인들을 향해 ‘의미 있는 고독’을 역설했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로의 분열은 타인의 애정과 관심에의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는 관계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인간의 시도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사회 풍토를 비판하며,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인간관계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조언했다. 더불어 타자의 개입 없이도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행위를 경계할 것을 촉구했다.
물론 사적 자아의 추구가 곧 고독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 다만 ‘공적 자아의 그럴싸함’에 지나치게 착념케 하는 현 세태에 대항할 수 있는 조금 강력한 무기를 생각해보자는 것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낯설음이나 새로움이 두려움이나 불편함으로 화하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 아닌가.
더욱이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상호 부정되고 그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을 정도의 간극이 존재한다면, 그 소모적인 대립과 충돌을 완화하거나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홀로 있을 때 행복할 수 없다면 함께여도 행복할 수 없다는 앤소니 스토의 논리는 상당히 옳다. 사적/공적이라는 분류 이전에 존재 자체가 정체성의 근거가 되어야하는 인간이라면, 그리고 어떠한 해석도 결코 실체를 파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으면 말이다. 고로, ‘행세’와 ‘위장’ 없는 솔직한 자신의 모습이 타인에게 온전히 용납되는 것,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진짜 기적은 천근만근 무거운 타인의 눈에 눌려있던 깊은 자신과의 재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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