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들어 세 명의 지인이 세상을 떴다. 세달 사이에 세 명이니 한 개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균적인 죽음의 통계 수치를 훨씬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너무 참혹하다. 물론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목숨을 잃는 판에 죽음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다만 그것이 본인이나 지인들의 문제로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죽음은 갑자기 큰 의미로 와 닿는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죽음을 현실의 문제로 생각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직 부모나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올 첫 번째 지인의 죽음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정신적 공황이 신체적인 징후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분의 심장마비 증상을 들은 후로 한달 동안 비슷한 증상이 내게 나타났다. 심장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후 두 번째 지인의 죽음 역시 급작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죽은 자 보다는 그녀가 남기고 간 두 어린 자녀들이 눈에 밟혔다. 여섯 살 난 첫 딸은 명민하기 그지없어 평소에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아이였는데, 제 어미의 죽음 앞에서는 아직도 ‘알고도 모르는’ 그 모습이 계속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첫 번째 죽음 앞에서 죽은 자를 애도했다면, 두 번째 죽음 앞에서는 남은 자의 고통을 더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그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지인의 남편이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멍든 가슴을 또 다시 망치로 내리치는 듯해서 고통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16년차 베테랑 경찰이었다. 아내에게는 책임감 있는 남편이었으며 두 어린 딸에게는 장난기 많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남아 있는 지인을 위로해야 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야 이제 이 세 번째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물론 나의 아픔과 어리둥절함, 비통함과 애처로움은 유가족들과는 비교할 바도 못된다.
그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차분히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떻게 죽지 않을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이다.
삶과 동시에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살아갈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삶의 마무리가 죽음이라면 결국 나는 내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죽음은 갑작스런 불청객이 아니라 내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로 받아들이자는 의미이다.
어쩌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삶을 잘 사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열심히 사는 것은 잘 죽는 것과도 같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워내며, 노후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 두고, 이웃을 돌보고 베풀 수 있게 된다면, 다음 세대에 주고 갈 수 있는 것을 준비한다면, 나의 죽음은 내가 이룬 삶의 제 대로 된 마무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갑작스런 지인들의 죽음과 달리, 내가 만약 90세 까지 살아야 한다면, 살 수 있게 된다면, 과연 그 삶을 통해 준비한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상상해 볼 문제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의 죽음이 슬픔이 아닌, 자연스러운 마무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열심히 준비하자. 미래의 삶을 열심히 준비하자. 그래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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