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유럽 출장길에 로마를 경유하게 되었다. 내가 이탈리아에 맨 처음 가본 것은 1999년이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서 받은 첫 2주 휴가를 나는 이탈리아 한바퀴 돌아보는 것에 몽땅 바치기로 했다. 베니스, 밀라노, 나폴리, 피렌체, 폼페이, 피사... 어느 도시도 매력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 중 최고는 단연 로마였다.
테르미니 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오늘은 영화 벤허에 등장하는 콜로세움 경기장을 갔다가, 내일은 로마의 휴일의 배경이었던 스페인 광장, 트레비 호수 등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매 시간 로마의 구석구석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프리웨이에 차선 표시가 안되어 있는 것도, 어느 음식을 먹어도 대략 내 입맛에 맞았던 것도, 앞서간 조상님들 덕분에 아직까지도 유적지에 관광 오는 여행자들을 상대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도, 내 눈에는 다 재미있었지만 내가 로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솔직하게 꼽는다면, 매력적인 남자들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설명하기에 앞서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학창시절, 친구들이 나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표현은 성격이 좋다는 것이었다. 언뜻 칭찬 비스무리 하게 들리는 이 말은, 사실 어감에서 느껴지는 것만큼의 긍정적인 표현이 결코 아니다.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여성으로 소개가 되어야 할 때, 콕 집어 미팅 같은 것을 주선하는 경우에 ‘그 친구 참 성격이 좋다’는 표현을 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친구 참 ‘예쁘다’는 시장성 있는 묘사를 할 수 있는 외모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이 ‘성격 좋다’고 할 때마다 내심 불쾌했지만 어쨌건 그 덕분에 나는 살아가면서 외모로 덕 볼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진로를 빨리 결정하게 됐다.
그러다 이십대 중반에 처음으로 찾은 로마에서의 호응은 대단했다. 식당이든, 술집이든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beautiful’을 외치며 나를 추켜세웠다. 이탈리아가 어떤 나라인가. ‘Made in Italy’라는 레이블만으로도 프리미엄을 받으며 패션의 첨단을 걷는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남자들이 갖는 미의 기준이 어찌 이리 바람직하단 말인가.
물론 인정한다. 그 중 절반은 내 가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던 소매치기가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아파트의 경비아저씨로 보이는 ‘알 파치노’가 치명적인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는 나에게 꽃 한송이를 건네자 나는 문득 내가 나라를 잘못 골라 태어난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더라면 양귀비나 장희빈 같은 역사적인 인물이 됐을지도 모르는 얼굴과 몸매로 엉뚱하게 미국에 터를 잡고 살던 나는 십 몇년 만에 로마에 다시 돌아온 것이 감개무량했다. 물론 공항 한 구석에 잠깐 앉아 있다 떠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공기는 그 때 내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확실했다.
그렇게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옛 추억에 잠시 잠기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을 분주히 오가는 젊은 ‘알 파치노’들은 이제 다 조카쯤으로 보였다. LA공항에 도착해보니 체크인 했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항공사 측에서는 로마에서의 경유 시간이 짧아 연결편에 못 싣게 된 것 같다며 다음 날 받는 대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 가방 안에 있던 내 집 열쇠! 차 열쇠! 오, 로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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