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다! 원래 잡혀있던 출장 스케줄에 얹어 비행기 표 한 장이라도 아껴보려는 나의 얄팍한 속셈에도 불구하고, 가족 여행을 한국으로 가자는 내 제안에 아이들과 남편은 만세를 불렀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남편의 반응에는 평소에 먹고 싶었던 한정식, 홍어, 갈비 냉면 등의 메뉴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한국 여행에 환호했던 첫 번째 이유는 슬프게도 비행기 안에서 장시간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평소에는 시간을 제한하고 어쩌다 선심 쓰듯 놀게 해주는 게임기를 한국 가는 내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흥분했다.
내가 한국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퇴임식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올해 35년 가까이 재직하신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신다. 첫 직장에서 평생을 일 하시고 그 곳에서 은퇴를 하는 감회가 어떨지, 나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아직도 정정하신데 은퇴라니 아버지가 그 허허로움을 어떻게 견딜까,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아버지는 처음 교직을 시작했던 학교에서 평생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제자들을 육성했다. 자신의 일터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의 깊이를, 벌써 직장을 몇 번 옮긴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는 나에게 항상 크나큰 산이고 길이었다. 지식과 지혜가 축적된 실력있는 사회생활의 선배로, 이 험난한 세상의 길잡이로,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고고한 분이셨다. 회사 생활에서 오는 문제로 고민하다 연락을 드리면 아버지는 언제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현명한 조언을 해주셨다. 내가 좀 손해 보면 모두가 편하다, 언제나 겸손해라, 끊임없이 공부해라... 지나고 보니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항상 옳았다.
마흔도 되기도 전에 벌써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것들이 많은 나는, 그 오랜 세월 옳고 그름에 대한 조금의 타협도 없으셨던 아버지의 대쪽 같은 청렴함을 본받기에는 너무나 허술하고 유연하다 못해 줏대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버지의 퇴임에 맞춰 제자들이 작은 저녁 모임을 제안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밤, 이제는 각기 다른 학교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나이 든 제자들이 모였다. 큰 식탁에 둘러 앉아 각자의 기억 속 스승의 모습을 추억하며 작은 술잔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자신의 기억도 맞춰 가면서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띠셨다.
아버지는 담담한 모습으로 은퇴를 맞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셨던 시골집을 개조해 은퇴 후에 사용할 서재 겸 오피스로 만드셨다. 케이블이며 인터넷도 설치해서 흡사 전원 펜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새로운 삶에 대해 반가움을 표현하는데 아직도 서투른 엄마는 “에구... 내가 이제 시골까지 내려가서 밥하고 빨래를 해야 하니...” 하면서도 분주히 쓸고 닦고 하셨다.
태평양을 건너 온 것도 모자라 몇 시간 더 차를 타고 들어가야 했던 아버지의 시골집은 창문이 많아 시원하고 상쾌했다. 집 마당만 나서면 맑은 개울물이 흘러 자잘한 물고기가 보였고, 커다란 나무 아래 평상에서 수박도 먹었다. 아버지는 은퇴를 앞두고 바쁜 일정에도 최대한 우리들과 시간을 함께 하려 노력하셨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심신이 지친 딸을 격려해 주셨다.
한국은 백 년만의 무더위라더니 아버지 퇴임식을 기점으로 많이 선선해졌다. 남편은 입맛이 비슷한 아버지와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고 싶던 음식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갔다. 아이들은 게임을 하다가도 할아버지가 오시면 한꺼번에 달려가서 안겼다. 아버지는 우리가 떠나오기 전날 중국에 학회가 있어서 먼저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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