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의 이야기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어느날 나에게 조심스레 상담을 청했다. 당시 우리가 속해 있던 그룹 내의 한 청년을 짝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며 귀까지 발그레해진 후배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짝사랑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스토리의 주인공 청년이 우리를 보고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청년은 단순히 인사를 하러 온 것이 분명했지만 내 옆에 앉아있던 순정녀는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후배의 고백을 듣기 전까지 그 청년은 사실 그다지 눈여겨 볼 일 없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튀지 않는 외모에 그저 성실해 보이는, 어느 모임에서나 흔히 볼 수 있던 그런 청년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녀의 고백을 듣고 난 후 그 청년의 모습이 달라 보이더라는 것이다. 자세히 뜯어보니 인상도 꽤 호감이 가고, 답답할 정도로 숫기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부분도 진중한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에서도 그가 유독 빛나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사랑은 상대방을 귀하고 가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녀가 얼굴 발그레하며 달뜬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한 순간 그 청년은 다른 사람 눈에도 아주 특별해 보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반성을 해봤다. 난 누구를 특별한 상대로 대접한 적이 있던가.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누군가를 대해 본적이 있던가.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회사 동료들이나 비즈니스 상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강의하면서 만나는 학생들에게도 단지 만나는 목적 그 이상이었던 적은 없었다.
상대가 어느 정도인지 은근히 파악하면서, 나이가 나보다 어리면 “니가 뭘 알겠니?”하며 무시하려 들곤 했다.
사실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기는 참 어렵다. 어느 자리에서나 그런 대접을 받으려면 돈이 엄청나게 많아 펑펑 쓰거나 - 그것도 잠시 뿐이지만 - 해박한 지식과 높은 식견을 갖고 있거나, 굉장히 헌신적인 일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김태희 같은 눈부신 외모를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을 그 순간만이라도 특별한 상대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좋은 서비스를 해준 웨이터에게 기대 이상의 팁을 줄 수도 있고, 어린 친구들을 성인으로 존중하며 대등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혹은 가끔 가는 레스토랑 주방장에게 “오늘 음식이 참 맛 있었다”고 칭찬을 건네는 순간 상대방은 자신을 특별하게 느낄 것이다.
나는 반성한다. 하나뿐인 남편이나 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최상의 대접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깊이 반성한다. 특히 수시로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던 남편에게 미안하다. 앞으로는 누구보다 내 가족이 우선 스스로 귀하고 가치 있게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우선 옆에 있는 두살배기 둘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막내는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야. 네가 엄마의 둘째로 태어나 줘서 너무 고마워. 네가 멀리서 엄마~하고 달려올 때 엄마는 너무 행복해. 우리 아들 사랑해!” 하고 닭살 멘트를 날리자 둘째가 씩 웃는다.
상대를 특별하게 만들면 결국 그 기쁨과 행복은 나에게 돌아온다. 나이가 들어도 배워야 하는 것은 매일 왜 이리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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