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레 그러겠거니 하게 되는 때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익숙한 이야기 전개가 포착되는 순간 주인공의 다음 행동을 의도치 않게 머릿속으로 그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익숙함은 상황과 사람에 대한 감상을 한정시키기 쉽다. 과정이나 결과를 보지 않아도 쉬이 어떠리라고 짐작되는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나 반응은 오히려 많은 순간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일상의 불안감을 줄여주는 익숙함은 때때로 불필요하게 과한 능숙함을 생산해내기도 한다. 실제 익숙잖은 문서를 읽을 때 더한 주의를 기울이고 낯선 관계에 더욱 신중해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지 않는가.
이에 반해 날마다 마주치는 지인과의 대화에서 예기치 않는 말실수를 한다거나 대충 훑게 되는 일상 문서들에 있을지 모를 오류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해지는 일도 발생한다. 우리가 실수라고 부르는 많은 순간들은 숙달된 경험에서 비롯된 부주의나 자만의 부산물일 때가 많다.
확실한 결론이 나기 전에 신속히 상황을 판단하고 재빠르게 그에 응당하다고 여겨지는 태도를 취하는 것, 과연 익숙함을 통한 숙달 정도가 항상 미덕이 될 수 있을까.
현대 미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사진에 회화를 접목시킨 이 독일 출신 예술가의 작품을 평하는 가장 유명한 단어는 ‘블러(Blur)’ 즉 ‘흐릿한 형태’이다. 미국의 추상주의가 끝날 무렵 등장한 리히터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모호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사물 혹은 삶 속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구상의 예술이라 불리는 사진이다. 사진의 대표적 속성인 선명성과 구체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마치 렌즈 초점이 빗나간 듯한 효과를 더하기 위해 회화의 추상적 요소를 덧붙여 완성한 그의 작품들은 일반적이고 흔한 소재를 다룸에도 좀처럼 일관성이나 뚜렷한 주제를 내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 ‘흐릿한 형태’는 결국 주제의 탈주제화를 부추기고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감상과 사고를 이끌어낸다. 결국 관객들은 리히터의 의도대로 쉬이 판단을 부추기는 사물의 외형이 아닌 속성과 실체를 보려는 노력을 비로소 시작하게 된다.
우리는 산에 핀 꽃과 바다 표면에 유유히 일렁이는 파도 등 마땅히 짐작되는 무언가를 보고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동은 바다와 맞닿은 어슬한 절벽 귀퉁이에 핀 한 송이 이름 모를 야생화가 주는 전율과는 다르다.
볼 것도 없이 무엇이 어떠할 것이라는 가정이 낳은 색안경은 혹 총천연색일지도 모를 우리의 주위를 단조롭게 만든다. 날마다 ‘불안정감’이란 거친 파도에 휩쓸려 변화가 달갑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함이 실로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이나 관계의 익숙함은 결국 무료함이나 권태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낯선 상황이 주는 모호함과 그에 따른 서투름이 늘 두려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물리적 나이와 무관한 젊음을 주창하고 있다면 쉬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도록 오히려 환경과 관계를 새롭게 조합하고, 초점의 변화로 생긴 불편함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모험에 스스로를 맡겨볼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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