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죽음으로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의무와 개인적 열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두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사랑의 대표적인 예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보다 더 오랜 원형이 있으니 바로 켈트의 전설로 내려오는 기사 트리스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콘웰왕 마르케가 조카 트리스탄에게 자신의 신부가 될 이졸데를 이송하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되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미 복수심과 사랑으로 얽힌 사이였다. 트리스탄이 전투에서 이졸데의 약혼자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텄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이들은 독약을 마시고 죽을 결심을 하지만 하녀가 독약대신 사랑의 묘약을 가져오는 바람에 죽음대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비밀스러운 연인으로 이중생활을 하던 이들은 발각되고 먼 이국땅으로 추방되어 숨진 트리스탄을 찾아 이졸데도 함께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많은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이를 즐겨 노래했으며 특히 13세기 초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장편 서사시로 남겨 훗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등 서구 연애 문학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10년 이상 준비해 최고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하였다. 젊은 날 바그너는 당시 전 유럽을 휩쓴 혁명에 연루돼 취리히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그는 후원자였던 베젠동크 부부와 가까이 지냈는데 베젠동크의 젊은 부인 마틸데와 사랑에 빠져 당시 작곡하고 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처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취리히를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을 피해 베네치아로 와서 2막을 작곡하게 되는데 당시 마틸데와의 연애감정이 절절해서인지 사랑의 감정이 생생하게 투영된 2막, 사랑의 장면은 남녀가 가지는 애욕과 그리움, 절망, 갈망 등을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바그너의 이 작품은 사건위주라기보다 남녀 내면의 감정묘사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있는 심리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런 심리 전개를 위해 반음계적으로 변화하는 화음, 끊임없이 옮겨가는 전조, 해결이 끝까지 미루어지는 무한선율, 비화성음에 의한 모호한 진행, 대담한 불협화음의 사용 등을 모두 결합하여 복잡다단한 사랑의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한국의 어느 드라마에서였던가 눈물짓는 옛 연인에게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쏘아붙이는 대사가 젊은 세대 사이에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 시대 사랑의 ‘변함’은 감정의 소멸이 아니라 대상의 이동이라는 얘기인데, 사랑의 비극은 죽음도 이별도 아닌 냉담에 있다면 죽음으로 끝난 이 두 연인의 사랑은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일수도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이 부재한 시대에 살며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난 가끔 이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이 최후의 비소같이 조심성 있고 다정한 음들을 놓치지 않고 듣노라면 의지와 이성보다 더 강한 오래된 이 사랑 이야기가 마법처럼 다시 사랑에 대한 동경과 신뢰를 회복시켜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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