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은행과 나이트클럽, 대형교회 등이 자리 잡으며 번영을 누렸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고양인 애틀랜타 오번 거리에는 부서져 가는 건물과 망가진 보도블락만이 남아 있다.
백인에 쫒겨 만든‘흑인 지상낙원’스위트 오번
부자들 모두 떠나 지금은 노숙자·마약 거리로
애틀랜타 도심에 있는 ‘킹(King) 메모리얼’ 전철역에 내려 북쪽으로 10분을 걸으면 오번(Auburn) 도로 표지판이 나온다.
‘스위트 오번’으로 알려진 남부의 역사 유적지이지만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걷는 젊은이, 도로에 주저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노숙자,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걸하는 걸인들. 하나같이 검은 피부를 지닌 이들을 무장경찰들이 24시간 주시하고 있다.
대낮에도 총성이 울리는 살벌한 곳이지만 40여년 전만 해도 흑인의 지상낙원으로 불리던 부자 마을이었다. 1956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은 스위트 오번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니그로 거리’로 소개했다. 이 마을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만든 것은 백인들이었다.
1906년 9월22일 ‘흑인들이 한 백인여성을 집단 강간했다’는 신문 보도에 애틀랜타의 백인 1만명이 다운타운으로 몰려나왔다. 백인들의 무차별 폭력으로 흑인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해 40명이 숨졌다는 얘기도 있다.
도시의 유력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과 컨스티튜션의 사주들이 꾸며낸 참극이었다. 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마한 이들에겐 도심 상권을 쥔 흑인들이 눈엣가시였고 그래서 짜낸 것이 흑인들과 일자리를 다투던 유럽계 이민자들을 오보로 자극하는 것이었다.
백인들에게 일터를 빼앗긴 흑인들은 건너편에 경제공동체를 만들었다. 흑인들은 ‘밖(백인)에서 벌고 안(흑인)에서 쓴다’ 는 구호 아래 그들만의 풍요로운 땅을 일궜다. 흑인 지도자들이 회사와 대학을 세웠고, 큰 교회가 뒤따라 생겼다.
1929년에 이곳에서 마틴 루터 킹이 태어났다. 이 지역 가장 큰 교회인 에버니저 침례교회 담임목사의 아들이었다. 젊은 킹에겐 스위트 오번은 삶의 시작과 끝이었다. 그는 흑인들이 백인들의 억압에 맞서고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되려면 무엇보다 경제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스위트 오번을 성공모델로 내세웠다.
그러나 킹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가 흑인들에게 주어지자 스위트 오번은 버려진 땅이 됐다. 거주의 자유가 확대되자 흑인 부자들이 비좁고 고립된 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 스위트 오번은 돈이 없어 오갈 데 없는 이들만 남았고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유적지로 전락했다. 킹은 자신의 비폭력 투쟁으로 쟁취한 자유로 고향 마을이 쇠락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스위트 오번은 매년 이맘때면 킹 목사 탄생기념일을 맞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축제 마당으로 변신한다. 21일 오전 11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기 취임식 직전 에버니저 교회에서 열리는 추모예배는 전국에 생중계될 예정이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축제는 오래 전 이곳을 떠난 흑인 엘리트들의 소유물일 뿐 오번을 지켜온 원주민들은 대물림되는 가난과 폭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19일 킹 센터 앞에서 만난 리디아 잭슨이란 한 흑인 주민은 “총기사건이 일상이 돼서 그런지 주변에 그 흔한 패스트푸드 매장 하나 없다”며 “스위트 오번이란 동네 이름부터 바꿔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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