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암 투병 시한부 인생 교사의 이별 여행
▶ 미 전국 옛 제자들과 해후하며 마지막 정리
데이빗 메나쉬(오른편)가 뉴욕의 한 식당에서 옛 제자인 스티븐 팔라핵(24)과 세르지오 노리에가(24)와 만나고 있다.
커리어 경력으로 본다면 그의 근무기간은 불과 15년, 길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빗 메나쉬(사진)는 마이애미의 코랄리프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3,000명의 제자를 배출하는 동안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 이제 40세인 그는 뇌암 4기에 접어든 환자다. 3차례의 수술, 2년 반의 키모테라피, 30회 방사선 치료를 거쳤지만 그는 암과의 투쟁에서 지고 있는 중이다. 승산 없는 싸움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는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마음속에 가져온 꿈의 실현일 수도 있다. 전국을 여행하며 옛 제자들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 것이다:“내가 너희들 삶에 변화를 주었니?(Did I make a difference?)” “난 지금 내 생의 마지막에 서 있다”는 그는“살날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게 허락된 그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했다는 만족감은 갖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난 7월 발병이후 시력을 거의 상실했을 때 그는 다시는 교실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왼쪽 몸의 사용도 불편해지면서 그는 장애인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 무기력하게 머무는 대신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옛 제자들과의 해후다.
8월, 메나쉬는 페이스북에 자신의 생각을 올리면서 코랄리프 하이스쿨 졸업생들에게 자신이 방문하면 묵어 갈 수 있도록 리빙룸 카우치를 제공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48시간이 채 안되어 미 전국 50개 도시에 살고 있는 제자들의 응답이 쇄도했다.
11월, 그는 마이애미에서 버스에 올랐다. 천천히 전국을 누비며 자신이 남긴 삶의 족적을 되돌아보는 마지막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룹은 30대 초반, 이제 막 가정을 꾸리고 삶을 정착해가는 연령대다. 메나쉬는 그들의 삶을 직접 보고 느끼며 자신이 젊은 날 열정을 기울였던 천직의 보람을 얻고 싶었다.
온라인 모금 캠페인이 그의 여행 경비를 돕고 있으며 그는 여행길의 경험과 인터뷰를 기록하여 여건이 허락된다면 여행이 끝난 후 책을 쓸 생각이다. 현재 아내와 별거 중인 그는 여행이 끝날 무렵엔 아내와도 재결합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메나쉬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옛 제자들의 글이 올라와 있다. “선생님은 저를 기억 못하시겠지만…”으로 시작되는 글도 여럿이다. 실제로 메나쉬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항암치료로 인해 기억력의 상당부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난 어린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16~17세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 못하지요. 교사로 가르칠 때의 일도 많이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만나면 옛 기억을 되살려 줄 것을 부탁하는데 “그들과의 기억 찾기가 상당히 흥미로운 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고 그는 행복해 한다.
솔직히 교사는 어느 면으론 실망이 큰 직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매일 밤 채점에서부터 과제 준비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만 매일 교실에 설 때마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나의 수업이 성공적인지 확신하기가 힘들었지요”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성공적’이었음을 알아가고 있다.
12월 초, 뉴저지 주 애틀랜틱시티에서 애냐리 켐라니를 만났다. 2001년 메나쉬의 프레시맨 영어클래스를 들었던 켐라니는 그가 “모든 학생이 기억하는 선생님”이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그의 수업은 기억 못해도 그는 기억할 것”이라는 켐라니는 “선생님의 열정, 선생님의 지성, 학생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던 선생님”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프레스 오브 애틀랜틱시티’의 기자인 켐라니(25)는 자신에게 저널리즘에 대한 생각을 맨 처음 심어준 사람이 바로 10년 전 메나쉬 선생님이었다고 말했다.
“내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과 같았지요. 만사에 관심은 많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은 원치 않았던 내게 저널리즘의 길을 알려준 분이 바로 선생님이셨지요”
스티븐 팔라핵이 같은 수업을 들은 것은 켐라니 보다 1년 후였다. 현재 뉴욕에서 스크린라이터 지망생인 그는 메나쉬가 “진정으로 우리 곁에 있어주었던 몇 분 안 되는 성생님 중 한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12월 중순, 메나쉬는 브루클린에 사는 팔라핵의 카우치에서 잤다. 선생님과 제자는 함께 이야기하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러 나가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둘이 앉아 우스운 인터넷 동영상을 함께 즐기고 웃으며 한참 웃다가 문득 선생님을 쳐다 보았지요” 파라핵은 메나쉬가 더 이상 자신들에게 작문의 포인트를 증명하라고 추궁하면서 무엇을 읽던 오픈마이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던 그 박력 넘치던 선생님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거의 실명 상태인 중년의 남자, 머리 오른쪽에 반원형의 수술자국 흉터가 뚜렷한 그를 보는 순간 “나의 예전 선생님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러나 그가 지금도 나의 친구란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메나쉬는 동부 해안을 따라 50명의 제자들을 방문했다. 11월엔 탤라하시에서 제자들이 그를 위한 파티도 열어 주었다. 뉴욕에서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지낸 메나쉬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 보스턴, 시카고, 샌디에고, 로스앤젤레스, 포틀랜드, 미네아폴리스 등을 비롯한 나머지 도시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10여개의 도시를 방문하고 난 지금 그는 자신이 세상에 남기고 갈 ‘유산’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이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낭비된 삶은 아닌 듯 싶습니다. 전에는 그 같은 확신을 못했는데 - 정말 솔직히 확신을 못했거든요” 그는 시한부 삶을 잊은 듯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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