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드라마 그 자체다.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에서 생활했지만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은 뒤 고독의 세월 끝에 정치에 입문, 2번째 대권 도전 만에 마침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 ‘궁정동의 총성’이 울렸던 1979년 이후 33년3개월 만에 청와대에 귀환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딸’로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가 모두 국가 지도자가 되는 역사를 쓴 박근혜 당선인의 출생에서부터 당선까지의 일생을 정리한다
■출생과 학창시절
‘인간 박근혜’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1952년 2월2일 군인인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2녀1남 중 장녀로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태어났다.
당시 재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35세, 초혼인 육영수 여사는 27세였다. 이후 박
당선인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와 박 후보는 1958년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는 자서전에서 “모래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세 종목을 두루 잘하면 동네 골목대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골목대장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했다.
학창시절 생활기록부를 보면 박 당선인은 요즘 표현으론 ‘엄친딸’이었다.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내내 반장을 맡았다.
장충초등학교 시절에도 특별히 어느 한 과목에 치우치지 않고 전 과목에 걸쳐 고루 성적이 좋았다. ‘우’가 많았던 4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학년의 과목에서 ‘수’를 받았다.
박 당선인은 성심여고를 거쳐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역사학과에 가기를 희망했지만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고 했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인 김완희 박사가 청와대에서 부친에게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한 이야기를 들은 게 계기였다고 한다.
10월 유신의 해인 1972년 대학가에 반정부 데모가 고조되던 때에는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대학시절 성적은 4.0만점에 3.82점을 기록했다.
■ ‘영애’에서 ‘퍼스트레이디’로
박 당선인은 아버지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뒤 2년 뒤인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13세의 나이로 ‘영애’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 당선인은 그해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서거했다는 소식에 급거 귀국, 약관 22세에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박 당선인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때의 심경을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이후 1979년 10.26사태로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5년여 간 퍼스트레이디 대행은 계속된다.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시찰을 나설 때 수행했고 매일 아버지와의 아침식사 때 조간신문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물었고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고 한다.
당시 일화 하나. 대한민국 인권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79년 방한, 주한미군 철수까지도 언급하면서 선친과 충돌했다고 한다.
박 당선인은 이때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잘린 여사를 만나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현실에서 인권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 입을 것이 필요하다”며 설득했고, 로잘린 여사가 이를 카터 대통령에게 전하면서 한미동맹의 위기국면을 넘기는데 중요한 막후 역할을 했다고 저서에 적었다.
당시 당선인은 걸스카우트 명예 총재직 수행과 새마을운동 정신을 이어가는 ‘새마음 운동’ 전개 등 국내 활동도 활발했다.
■10.26과 18년간의 칩거
박 당선인은 1979년 10월27일 새벽 1시30분께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는 전화를 받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김계원에게 저격 당시 상황을 간단히 들은 박 당선인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김계원은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고 답했다.
박 당선인은 10.26 이후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와중이던 1979년 11월 27세의 나이에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후 성북동 자택 등에서 무려 18년간 사실상 칩거에 들어간다. 이 기간에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거나 서적을 탐독하며 ‘훗날’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영남대학교 이사장 등을 맡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은 박 당선인에게 암흑기와 같았다. 박정희 체제 하에서 잘 나가던 인사들이 대부분 등을 돌렸다. 이 때문에 박 당선인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한 번 배신하고 나면 그 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면서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고 적었다.
■정계 입문, 대선 경선 패배
박 후보는 18년간의 ‘칩거’ 이후 46세인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에서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위기를 방관할 수 없었다는 게 정계입문 변이었다.
2000년에는 총재 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위로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년 상향식 공천, 당권ㆍ대권분리 등을 골자로 한 ‘7대 당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런 가운데 2002년 5월에는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철도연결’ ‘금강산댐 공동 안정성 조사’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협의했다.
2002년 복당한 박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등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이어 치러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 선거에서 완승을 이끌어냈다.
2007년에는 첫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당 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대세론’으로 부활
경선 패배 이후에도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이른바 ‘대세론’을 형성, 당내 친 박(친박근혜)계의 정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대표적인 것이 2009~2010년 정국을 달궜던 세종시 수정안 논란. 이 대통령과 달리 박 후보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했다.
그는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면서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2012년 4.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152석을 차지하는 대역전승을 거두며 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입지를 굳혔고 8월20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에 선출됐다.
그리고 12월19일 제18대 대선에서 새 정치를 앞세운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의 지원을 등에 업은 문 후보와의 치열한 본선에서 힘겨운 승부 끝에 마침내 대권을 거머쥐며 자신이 종종 말했던 “저는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만 생각하겠다”는 약속을 펼쳐 보일 기회를 갖게 됐다.
■막중한 과제
올해 만 60세인 박 당선인은 부녀가 모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세계적으로도 진기한 기록의 주인공도 됐다.
또 5선의 다양한 의정경험과 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준 것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호 선장’이라는 중임을 맡게 된 이유로 해석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제기된 불통 이미지와 부친의 과거사를 둘러싼 역사관 논란은 그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박 당선인은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국민대통합’의 이행을 위해서라도 향후 조각과 정책의 집행과정에서 세대와 이념을 포괄해 전 국민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을 선보여야 한다는 막중한 시대적 과제를 안게 됐다.
또 미국과 중국, 일본 등 3강의 한반도를 둘러싼 힘겨루기 속에 장거리 로켓 발사에 성공한 북한 김정은 3대 세습정권과 맞서며 남북관계의 새로운 틀을 짜야하는 외교와 국방의 과제도 떠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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