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증에는 장기기증에 관한 소지자의 의사가 표시되어 있다.
운전면허증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ID 오른쪽 하단에 조그만 핑크색 동그라미가 하나 있을 것이다. 동그라미는‘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신의 장기를 기증할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면허증 소지자의 결정을 보여준다. 동그라미 안에 기증자(donor)라는 단어가 적혀 있으면‘내가 사고사를 당할 경우 몸 안의 장기를 적출해도 좋다’는 뜻이다. 반면 빈 동그라미면 기증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선‘동의하나’ 질문, 특별한 희생 여부 결정
유럽은‘동의하지 않나’ 물어봐 의무감을 강조
인명피해를 수반한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경찰을 비롯한 1차 대응팀은 부상자와 사망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면허증을 확인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장기기증에 관한 이들의 결정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장기기증 여부를 묻는 방식을 달리하면 각 개인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모든 운전자들은 면허증 신청서 작성 때 장기기증 의사를 묻는 항목에 ‘예’ ‘아니오’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신청서의 해당항목의 문구는 ‘(내게)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장기 기증에 동의한다’로 되어 있다.
반면 유럽의 일부 국가들 ‘장기기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문안을 제시한 후 개인의 선택을 요구한다.
이때 ‘기증에 동의한다’는 긍정적 서술에 대해 ‘네’ ‘아니오’의 답변을 요구하는 것을 ‘옵트-인’(opt-in) 방식이라 부르고 그 반대, 즉 ‘동의하지 않는다’는 문안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을 ‘옵트-아웃’(opt-out) 방식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옵트-인 방식에서는 각자가 기증자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반면 옵트-아웃 방식에서는 기증자가 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결국 똑같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무엇보다 결과에서 큰 차이가 난다.
미국 등 옵트-인 방식을 택한 국가들의 경우 전체 운전면허 신청자의 15%만이 신장 기증을 택하는데 비해 옵트-아웃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곳에서는 90% 이상이 기증을 결정한다.
코넬과 스탠포드 대학 연구원들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된 보고서에서 옵트-인과 옵트-아웃 가운데 어떤 방식인가에 따라 사람들은 기증행위를 달리 이해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들에 따르면 옵트-인 방식은 운전면허 신청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타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극히 덕망 있고 예외적인 이타주의가가 될 것인가’를 묻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비해 옵트-아웃 방식은 ‘선량한 시민들과 커뮤니티 구성원들이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를 피하려는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은가’를 묻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장기증 행위는 옵트-인 방식에서는 아무나 모방하기 힘든 거룩한 선택, 옵트-아웃 방식 하에서는 건전한 양식을 지닌 시민으로서의 의무로 해석된다는 얘기다.
코넬과 스탠포드의 연구원들은 설문조사와 인터뷰에 응한 미국인 참여자들에게 네덜란드의 옵트-인 방식과 벨기에의 옵트-아웃 방식에 관한 자료를 읽어본 후 각개 프로그램 하에서 장기기증 결정이 얼마나 큰 이슈인지를 납세, 투표, 자원봉사 등 다른 사회적 행동들과 비교해 순위를 매기도록 했다.
그 결과 참여자들은 옵트-인 방식 하에서의 장기기증 결정에 개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단식투쟁과 동등한 자리를 내주었다.
개인적 가치는 선택과정에 고민이 따르지만 사회적 의무는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옵트-인 방식을 채택한 국가에서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들의 비율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 대답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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