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리앤드로 죽림정사(주지 보현 스님)가 태어난지 1년이 다 돼간다. 생기기 전에도 거의 인기척이 없었듯 죽림정사는 태어난 뒤에도 별다른 소리없이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를 지켜왔다. 알음알음 모여든 불자들이 법일 스님 지도아래 참선정진을 위주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죽림정사에서 오는 21일(일) 불상 점안식을 봉행한다. 개원법회조차 생략하고 침묵모드 속에 조용한 참선도량 역할을 해온 죽림정사이기에 이번주 일요일 점안식은 죽림정사가 북가주 한인불자들과 처음으로 공개만남을 갖는 자리이기도 하다. 법일 스님은 점안식에 불자들의 많은 참석을 바란다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고문을 보내왔다.
불교는 쉬울 수도 있는 종교이며 또한 너무 심오해서 어려운 종교이기도 하다. 믿음의 종교이면서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선사상은 너무나 심오해서 인지가 발달해서야 이해하게 되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유럽 및 미국 등지에서 불교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은 오래 전부터 선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인이 점점 불어나고 있는 상태다. 도서관에도 가보면 선사상 등 불교에 관한 책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유럽의 불란서도 불교인이 오백만 명을 넘은 것이 벌써 몆년 전 일이다. 독일의 낭만파 철학자 쇼펜하우워(1782-1865)가 말하기를 “인간성을 고취시키는 서적으로 세계가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책이다.” 라고 극찬한 인도의 우파니샤드(4000년 내려온 철학서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들아, 가서 무화과 열매를 따오너라.” “이미 따왔습니다.” “그러면 그 열매를 쪼개어 보아라.” “무엇이 들어있느냐?” “아버지시여, 씨앗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아들아, 그 씨앗을 다시 쪼개어 보아라.” “무엇이 들어있느냐?” “씨가 들어있습니다.” “아들아, 그 씨를 쪼개어 보아라. 무엇이 있느냐?” “아버지시여,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아들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그 무엇이 커다란 무화과를 길러내지 않느냐?” “이것이 곧 실재 즉 아트만이다”했다.
실재 즉 불성이며, 불성 즉 중생의 청정한 성품인 것이다. 중생은 청정한 성품을 깨닫기 위하여 선수행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은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뜻함이 아니다. 모든 것을 생하게 하는 역동적인 진공(Vacuum)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어진 진공, 이곳으로부터 만법이 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만법을 생하나 비어져있는 당처는 본 그대로 조금도 미동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종일 오고가고 활동하나 움직임이 움직임이 아닌 “항상 그대로 여여할 뿐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관통한다.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수행을 통하여 증득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묘법인 것이다. 요즘 수행공부하는 사람들은 보고 듣고 아는 것과 육근의 끝에 나타나는 빛과 그림자의 알음알이로서, 본래인의 참나를 삼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진실로 일념 미생전의 저쪽 세계를 꿰뜷어보면 영원히 변치 않는 별천지가 있다. 이는 일체를 초월한 세계이니 곧 내 집이며 나의 본래의 참모습인 것이다. “고요, 고요, 고요하고, 깊고, 깊고, 또 깊은 곳이다.”
우리 수행자들은 과연 생멸심이 끊어져가고 있는지를 종종 살피고 돌아봐야 한다. 선은 알음알이로 요리저리 따져서 알 수 있는것이 아니다. 목숨이 경각에 있어 정신이 혼미할 그 때 누가 물어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실질적인 수행만이 생사를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생멸심이 다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함이 극에 가면 맑아지고, 맑아짐이 극에 가면 밝아지고, 밝아짐이 극에 가면 통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홀연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가을도 깊어가고 있다. 오곡이 익어가는 시절에 죽림정사에서는 부처님 점안식을 하게 됐다. 이번에 조각된 불상은 조각가가 육개월동안 음식을 가려먹고 매일마다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서 혼신을 다하여 조각했다고 한다. 재료도 한국에서는 극히 귀한 홍송으로 했다고 한다.
불상은 안으로의 법신을 밖으로의 표상인 화신으로 나타냄인 것이다. 부처님이 2500년 전 인도에서 탄생하신 것도 법신이 석가의 본체라면 육신의 석가는 법신의 영상인 화신인 것이다. 부처님에게는 삼신이 있다. 법신, 보신, 화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셋이나 삼위일체로 하나인 것이다.
법신은 사람사람이 마음의 본체를 지적한 것으로 석가의 본신을 나타낸 말이다. 즉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우주가 생기기 전 면목) 이 우주의 핵심체를 법신이라 한다. 보신은 개개인의 뚜렷이 밝은 마음 광명이다.
법신자리가 시공이 끊어진 마음의 본체라면, 그 마음의 본체가 드러날 때면 우주를 삼키고도 남는 태양광보다 더 밝은 마음 광명이 나타나는 것이 보신이다. 화신은 마음 본체의 그림자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볼 때는 인도에서 태어난 부처님은 화신불을 뜻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안으로의 법신이 밖으로의 화신의 표상을 나타낼 때는 부처 아닌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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