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집을 치우려 드니 온갖 크기의 가방들이 구석구석에서 나온다. 사람마다 돈 쓰는 곳이 다른지라 어떤 이는 화장품에, 어떤 이는 명품에, 어떤 이는 사업체에 눈독을 들이지만 아마도 나는 늘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가방에 눈독들였던 것 같다.
하나같이 싸구려지만 나름대로 크고 작은 크기에 가볍고 질기고 실용적인 이유로 언젠가는 떠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속에서 눈에 띌 때마다 하나 하나 장만했다. 큰 가방, 중간 가방, 작은 가방, 끄는 것, 메는 것, 드는 것..
통털어 여행이라 부르는 떠남에는 얼마나 많은 모습이 있을 수 있는건지.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어 남 몰래 줄행랑놓는 야반도주도 여행이라 치면 여행일 수 있고 낮에는 해변 백사장에 널부러저 비몽사몽간에 시간을 죽이다 밤이면 휘황한 불빛 아래 눈에 불을 켜고 도박에 빠지는 며칠간도 여행이라 부른다.
깃발을 쫒아다니며 뒤통수로 구경하고 증명사진 박아오는 며칠도 여행이며 목적도 없이 노잣돈 헤아려가며 물 마시고 타박타박 걷는 여행도 여행이다. 내게 여행의 이미지로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으로 다가온 것은 헤르만 햇세의 소설, 골드문트와 나르찌스에서 였다.
골드문트가 드디어 신학교를 때려치우고 들판으로 걸어나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의 일생에 걸친 여행, 그처럼 아름답고 통쾌하며 장렬하고 슬픈 여행길이 또 있을까?
벌써 어느 새 수십년전, 아직 기운이 펄펄했을 때라 시간이 날때마다 산으로 들로 혼자 쏘다니던 때였다. 해안을 따라 달리다가 어느 한적한 초원위에 coastal access 란 표지가 보여 무작정 차를 세웠다. 아무 꾸밈없고 너무도 특별하지 않아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편편히 펼쳐진 풀밭위의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해변이 쉽게 나타날 것 같잖아 그냥 풀위에 누워버렸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들이 한가하고 바람은 산들거리며 멀리서 새소리가 청아했다. 이곳이 바로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나오면서 지나게 된 바로 그 초원인가 싶도록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안락함에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뜨며 일어나 앉았더니 언제부터 였을까. 백여마리는 좋이 됨직한 소떼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둘러서 있었다.
이게 웬일일까, 내가 어디에 와 있나, 싶은 어리둥절함도 잠시, 저 수많은 소들이 갑자기 구령맞춰 내게 달려들어오면 나는 어쩌지? 하며 살짝 겁나는 순간, 소떼들은 한 마리 한마리씩 체머리 흔들듯 머리를 흔들며 방향을 돌려 흩어지기시작했다.
마치 길 잃고 쓰러진 어린애를 보고 쟤가 누구냐, 아픈 건가, 다친건가, 어떻게 해야지? 하며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고 있던 중, 부시럭부시럭 일어나는 어린 애를 보고, 에이 아무것도 아니네, 그냥 잠깐 잠든 애잖아, 하고 슬슬 제 갈길을 가는 촌로들처럼.
생의 몇 안되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던 그 때를 간혹 되돌아보며 내게 있어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종종 생각해 본다. 아마도 관광여행이라기 보다는 순례나 방랑같은 것이겠지...
편한 집을 놔두고 방랑을 동경하는 이들의 핏속엔 정착하기를 꿈꾸는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몸도 돈도 협력을 안해줄 상황인데도 내 안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소리. 죽기 전 언젠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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