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우 법사의 공부나눔이 수년째다. 30여년 전, 학이시습회를 결성해 재가불자 공부모임을 이끌어온 것을 빼더라도 그는 몇 년 전에는 1년가량 대승기신론과 유식학에 대한 토요 연쇄특강을 진행했다.
이후로는 전자우편을 통해 매번 주제를 정해 공부나눔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 돌린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글을 싣는다. 참선모임 수선회를 이끌고 있는 이임성 박사의 공부열도 식을 줄을 모른다.
공학박사로 대학교단과 경영일선에서 활약하고 은퇴 뒤 실리콘밸리 한미봉사회 이사장을 맡는 등 봉사활동을 펼쳤던 그는 특히 한국어에 서툰 청소년 불자들을 위해 영어로 부처님 법을 전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이 박사가 최근 수선회 금요참선 뒤 틱낫한 스님의 소책자 공부계획을 알리면서 덧붙인 <중도에 대하여>를 함께 싣는다. <편집자>
◇사마타와 위빠사나
지<止(사마타)>와 관<觀(위빠사나)>이라고 번역되는 것으로
라는 편의점과 같다. 선종에서는 주로 <정혜(定慧)>라고 부르기를 선호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선정바라밀>이라고 한다.
바라밀법이란 무엇인가. 저 언덕에 간다(도피안)는 뜻인데 저 언덕에는 <바람시원하고 경계찬란한 곳 희망의 나라>를 말한다.
이것이 왜 불법(佛法)이 되는가. 남에게는 덕이 되고 나에게는 수행이 되는 회향(廻向)법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시바라밀을 보자. 만일에 내가 한 보시가 나에게 수행으로 돌아오지 않으면(廻向) 돈과 몸만 버리는 꼴이 된다. <마음 주고 몸도 주고 눈물 주고> 다 해봐야 상실감이란 퇴행(退行)만 남는다. 이러자고 보시하는가.
또한 보시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는 불교를 같이 논하지 말라. 그런 사람은 신심이 없기 때문에 수행은 있을 수가 없다. 껍데기만 불자고 내용은 없다. 가난한 자의 한 등불 공양이 어찌 성불의 수기를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계를 지키는 지계(持戒)도 바라밀 법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을 가슴에 담는 계> 하나만을 지킬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생을 가슴에 품지 않는 자는 계로써 다스린다. 자비를 키워내지 못하면 지계바라밀로 다스린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의 다섯가지는 부처님께서 지정하신 바라밀법이다. 회향(廻向)법이다. 여기서 지금 논하고자 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도 바라밀법이라는 대전제를 알아야 한다.
불교는 수행이 목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자들은 입만 벌리면 너도 나도 수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수행이야기에서 화향법인 바라밀법이 쏙 빠진다는 것이 앙꼬없는 찐빵인 줄을 모르는 채 한국불교의 가르침이 된 것은 통탄할 일이다.
그 힘든 수행은 왜 하는가. 좋아하니까. 좋아하면 하나도 어렵지가 않다. 왜 좋아하는가. 전생의 업이니까. 만일에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대화가 이 지경이 된다면 불교는 간데 온데 없게 되고 이판이나 사판이나 같이 된다. 이(理)판 사(事)판이다. 이리되면 <끼리끼리 놀고>, 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가 않다. 지관과 정혜와 선정으로 표현되는 수행은 절대적으로 바라밀법이다. 회향법(廻向法)이다. 나에게로 돌아오고 너에게로 되돌아가는 공양법이다. 바라밀은 불공이다.
<이윤우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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