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갓 결혼 했을 때다. 베일리라고 하는 영국인 부부가 태평양에서 조난을 당해 백여일을 표류하다 한국어선에 의해 구조된 적이 있다. 한국인이 구했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의 이야기가 대서특필됐었고 곧 표류기가 책으로 나왔다. 워낙 바다를 좋아해서 언젠가는 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을 때여서 그 책을 사서 구절구절을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 하도 열심히 읽어서 그들이 겪은 많은 일들이 마치 내 일처럼 생생히 기억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배가 침몰한 후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물건을 건지던 때가 인상적이었다. 여자가 리차드 삼세와 힛치콕, 그리고 사전 두개를 건졌다고 하니까 남편이 짜증을 내면서 이런 판국에 책이 무슨 소용있느냐고 타박하는데 여자는 그들이 돌아가면 그 책들이 자신들 도서관의 첫번째 책이 될것이며 표류하는 동안, 그 책들을 줄줄이 읽고 토론하고 음미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풍전등화의 순간에도 사람은 참 멋있을 수 있는거구나, 인상깊었다.
책이란 게 그렇다. 책장에 꽂혀있을 때는 그냥 물건이지만 그 속의 의미가 타인에게 전달될때는 생명이 있는 무엇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씹으면 씹을 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난다. 아니 책뿐만이 아닌 것 같다. 하다못해 냉면 한그릇을 먹어도 단 한번 먹어본것으로는 결코 그 맛을 알수 없다. 진짜 맛은 여러번 되풀이 해서 경험하고 느끼고 하면서 알아가는 것 같다.
이즈음 손자하고 나란히 앉아 손자가 물리지도 않고 되풀이 해서 보는 만화영화를 곁에서 함께 본다. 몇 개의 영화를 돌아가면서 보는데 이즈음은 Up 이란 것에 꽂힌 모양이다. 근데 처음 봤을 땐 그저 어린애용 만화영화로구나, 생각했는데 자꾸 보니까 정말 깊이있고 삶의 철학이 있는 영화이다. 모험을 동경하는 어린 아이들이 친구가 됐다가 어른이 되어 결혼 하는데 발랄하고 방방 뛰는 신부는 수줍어하는 신랑에게 달겨들어 키스를 하고 신부측의 하객들은 전부 일어나 환호성을 치고 신랑측 하객들은 얌전히 정장을 차려입고 가만히 앉아 박수만 짝짝 친다. 사람들이 대체로 처음에는 자기와는 다른 사람에게 끌린다는 이야기다. 모든 결혼은 문화적 차이를 안고 시작하지 않던가.
재미나게 살다가 여자가 아이를 못갖는다는 걸 알고 우울해 할때 동경하던 파라다이스 폭포를 찾아가기로 하고 저금을 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은 타이어가 터지고 어느 날은 남자의 다리가 부러저 병원비가 필요하고 어느 때는 폭풍우에 나무가 지붕을 무너뜨려 저금을 헐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점점 나이가 먹어 아내가 비실비실하는 걸 눈여겨 본 남편이 아내를 위해 여행을 준비하지만 아내는 먼저가고 함께 살던 집 곁은 재개발이되어 불도저로 밀고 난리다.
여차여차해서 집은 넘겨주어야 하고 시설에 들어가게된 남편이 밤새 지난 날을 추억하며 집을 둘러보다가 어렸을 때 아내와 함께 꿈꾸던 앨범을 되돌아보며 탈출을 결심한다. 헬륨으로 풍선을 불어 집과 함께 파라다이스 폭포로 날아가기로 한것이다. 여차여차해서 함께 가게 된 어린 소년과 동료들에게서 왕따를 당하고 쫒겨난 강아지, 쫒기는 새가 일행이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험을 경험하며 때에 따라서는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메세지도 주고 무엇이 진정한 삶의 의미인가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보면 볼수록 많은 것을 전해주는 영화를 손자덕에 정말 즐겼다.
진실은 단순한거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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