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신 것 같다고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노인성 치매에 허리 디스크가 있으셨던 외할머니가 요즘 들어 상태가 악화된 것 같다고 했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나와 계셨던 엄마가 부랴부랴 한국으로 들어가셨다.
외할머니는 작년에 수술을 받으셨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가을걷이나 끝내고 병원에 가겠다고 미루시더니 급기야는 걸음을 뗄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입원을 하신 것이다. 삼천평이 넘는 논밭을 혼자 건사하시느라 허리 펼 날이 없이 사셨던 외할머니에게 입원은 어쩌면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 같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시골에서는 처녀 공출이 극심했다고 한다. 바로 정신대 차출이었으리라. 딸이 있는 집에 관리들이 오면 덜덜 떨었다고 했다. 겁이 난 외증조할아버지는 서둘러 딸의 혼례를 치러야 했고 외증조할머니는 외할머니를 붙들고 많이도 우셨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몇년이 지나 할머니는 동갑내기 젊은 남편과 사별을 하고 말았다.
억지로 시집을 보냈다가 일찍 혼자 된 딸을 보며 외증조부는 “살다가 정 힘들거든…” 하시며 외할머니 몫으로 논도 사주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시던 외할머니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보니 친정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남편 없는 시집살이는 호되기만 했다. 외할머니는 항상 일을 하셨는데 특히 겨울에는 베틀을 떠나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베 짜는 모습은 왼손과 오른손의 움직임이 매우 달라 아주 어려워 보였지만 한올도 틀림이 없어서, 외가에 갈 때면 늘 우리 형제들은 올망졸망 앉아 감탄하며 구경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옷은 흰색이거나 검정이 전부였다. 솜씨가 좋으셨던 외할머니가 동네 신부의 분홍 양단 옷을 마름질하던 그때도 외할머니는 흰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계셨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애지중지 키워 시집을 보내면서도 “나는 염려마라, 나는 괜찮으니 시댁에 잘해라” 하셨단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늘 씩씩한 사람인줄 알았다고 했다.
수없이 많은 명절, 해마다 오는 어버이날, 큰며느리인 엄마는 당연한 듯 시댁에 계셨고, 시부모님을 항상 우선으로 하셨단다. 그 시간 산골짜기 밭에서 일하고 계셨던 외할머니는 늘 외로우셨을 것이다.
작년 한국 나갔을 때 외할머니의 장롱을 정리해 드렸다. 그 안은 엄마와 우리들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우리가 어려서 입었던 옷들이나 엄마가 여행지에서 사오신 잡다한 기념품들, 유효기간이 지나도록 열지 않은 약들, 우리들이 오며가며 사다드린 오래된 화장품들, 손자 손녀들을 위해 아껴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장롱 깊숙한 곳에서 발견하며 엄마는 기가 막혀 하셨다. 이것들을 보관하느라 정작 당신의 물건들은 밖에다 놔두시더라고.
한국에 가신 엄마는 딸의 얼굴을 보고 한층 안정을 찾으신 외할머니를 모시고 심청축제가 열리고 있는 곡성에 가셨단다. 여러 종류의 장미들도 감상할 수 있고 심청이가 뛰어들었다는 인당수와 궁궐도 재현해 놓아 볼거리가 많았다고 하셨다. 그 궁궐에서 왕후 복을 입은 외할머니와 당의를 입은 상궁 엄마가 함께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 외할머니의 머리에 얹은 가채가 무거워 보였다.
다른 사진에는 행사장 한쪽에 전시되어 있던 베틀과 농기구가 배경이었다. 외할머니의 얼굴에 보일 듯 말듯 미소가 번져 있었다. 갓 시집와 남편을 잃었던 스물넷의 젊음이 두려워 어서 늙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외할머니가 평생 익숙하고 친한 것들을 만나니 그제야 안심이 되셨나보다.
지니 조
마케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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